George Eliot

우리 영혼의 가장 커다란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by 김양훈

"We can only have the highest happiness, such as goes along with being a great man, by having wide thoughts and much feeling for the rest of the world as well as ourselves; and this is what we call goodness. What do we live for, if it is not to make life less difficult for each other?"

- George Eliot <The Mill on Floss>


"우리가 흔히 위대한 인간이 되는 것과 함께한다고 여기는 '최상의 행복'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향해 넓은 사고와 깊은 감정을 가질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선함(goodness)'이라 부릅니다. 서로의 삶을 덜 힘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의『플로스 강의 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에서

Maggie Tulliver in <The Mill on the Floss>
글의 배경 및 해설

이 구절은 소설의 주인공 매기 툴리버(Maggie Tulliver)의 내면적 성장과 작가 조지 엘리엇이 평생 추구했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① 소설적 맥락: 매기의 갈등과 각성

소설 속 매기 툴리버는 매우 지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지만, 보수적인 가부장적 사회와 가족(특히 오빠 톰)의 엄격한 잣대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공감(Sympathy)'이야말로 고통스러운 삶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문장은 매기가 개인의 이기적인 행복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도덕적 성숙을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② 조지 엘리엇의 '인류교(Religion of Humanity)'

조지 엘리엇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멀어졌지만, 종교가 가진 윤리적 가치와 이타심은 유지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녀는 이를 '인류교'라 불렀는데, 신에게 기도하는 대신 내 옆의 이웃이 겪는 짐을 덜어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라고 보았습니다.

③ 'Wide Thoughts'와 'Much Feeling'

엘리엇은 지성(넓은 생각)과 감성(깊은 감정)이 결합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선(Goodness)'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Wide Thoughts: 내 울타리 밖의 세상을 이해하는 지적 확장.

▪︎Much Feeling: 타인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는 감정적 깊이.

요약 및 메시지

이 글은 단순히 "착하게 살자"는 도덕적 훈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만들려고 노력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이 가장 커다란 행복(Greatness)을 느낄 수 있다는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조지 엘리엇(본명 메리 앤 에반스)의 『플로스 강의 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은 단순히 한 소녀의 성장기를 넘어, 인간의 본능과 사회적 규범, 그리고 가족 간의 애증을 날카롭게 파헤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엘리엇의 자전적인 요소가 짙게 깔려 있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줄거리와 함께 이 작품이 왜 고전으로 칭송받는지 살펴봅니다.

1. 줄거리: 물결처럼 엇갈린 남매의 운명

소설은 영국 세인트 오그스(St. Ogg's) 마을의 '덜코트 방앗간(Dorlcote Mill)'을 배경으로 합니다.

유년 시절의 빛과 그림자

주인공 매기 털리버는 영리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입니다. 그녀는 오빠 을 끔찍이 사랑하고 그의 인정을 갈구하지만, 현실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톰은 매기의 넘치는 열정과 지적 호기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매기는 늘 "여자답지 못하다"는 비난 속에 소외감을 느끼며 자랍니다.

가문의 몰락과 비극의 시작

매기의 아버지 털리버 씨는 평생 공들인 방앗간을 두고 변호사 웨이컴과 법적 분쟁을 벌이다 패소하여 파산합니다. 이 충격으로 아버지는 쓰러지고, 가족은 빚더미에 앉게 되죠. 톰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냉혹할 정도로 성실하게 일에 매달리고, 매기에게는 가문을 망친 웨이컴의 집안과 절대 교류하지 말 것을 강요합니다.

갈등: 필립 웨이컴과 스티븐 게스트

매기는 아버지의 원수인 웨이컴의 아들, 필립과 비밀리에 교감을 나눕니다. 필립은 매기의 지성을 알아봐 준 유일한 인물이었죠. 하지만 톰에게 들키면서 이 관계는 강제로 끊어집니다. 이후 매기는 사촌 루시의 약혼자인 스티븐 게스트에게 강렬한 이성적 끌림을 느낍니다.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강을 따라 멀리 떠나게 되고, 비록 매기가 도덕적 죄책감 때문에 돌아오지만 마을 사람들과 톰은 그녀를 '부도덕한 여자'로 낙인찍어 외면합니다.

결말: 홍수 속의 화해

거대한 홍수가 마을을 덮칩니다. 매기는 위험을 무릅쓰고 배를 저어 고립된 톰을 구하러 갑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톰은 비로소 매기의 진심과 사랑을 깨닫고 "오빠(Magsie)!"라고 부르며 그녀를 끌어안습니다. 하지만 거센 물살에 밀려온 커다란 조각배가 그들의 배를 덮치고, 남매는 영원히 결합된 채 강물 속으로 사라집니다.

2. 작품평: 왜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① 심리적 사실주의의 정수

엘리엇은 인물의 내면을 해부하듯 묘사합니다. 매기가 느끼는 지적 갈망과 도덕적 의무 사이의 갈등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죠.

② 젠더와 사회적 제약

이 소설은 19세기 영국 사회가 여성의 지성을 어떻게 억압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똑똑한 매기는 집안의 골칫덩이로 취급받고, 평범한 톰은 교육의 기회를 독점합니다. 매기의 비극은 그녀의 성격 탓이 아니라, 그녀의 에너지를 담아내지 못한 좁은 사회적 그릇 때문임을 엘리엇은 역설합니다.

③ '강(River Floss)'의 상징성

플로스 강은 생명줄인 동시에 파괴적인 운명을 상징합니다.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의미하기도 하죠. 마지막 홍수 장면은 다소 갑작스럽다는 비판도 있지만, 사회적 규범 안에서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남매가 오직 '죽음'이라는 자연적 거대함 속에서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 장치입니다.

"지식은 세상을 넓게 만들지만,
사랑은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매기 털리버의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이렇지 않을까요? 톰의 딱딱한 정의감과 매기의 뜨거운 감수성이 부딪히는 과정은 지금 봐도 참 가슴 아픈 구석이 많습니다.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George Eliot and the Sympathetic Imagination by Sarah Barnette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은 영국의 소설가, 시인, 언론인, 번역자이자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본명은 메리 앤 에번스(Mary Anne Evans)이다.

그녀는 《아담 비드》(1859),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1860), 《사일러스 매너》(1861), 《로몰라》(1862–63), 《미들마치》(1871–72)와《다니엘 데론다》(1876) 등 총 7권의 소설을 썼으며 그녀가 쓴 소설 대부분은 시골 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속에서 보여준 사실주의와 심리적 통찰로 유명하다.

당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본명으로 책을 출판한 반면, 엘리엇은 여성 작가는 태평한 연애소설밖에 쓰지 못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고자 필명을 사용했다. 또한 엘리엇은 편집인과 비평가로 이미 잘 알려진 자신과 자신의 소설이 분리되어 평가받기를 원했다. 그녀가 필명을 썼던 다른 이유는 아마도 대중들이 자신의 사생활을 파해치는 것을 막아 그녀와 유부남 조지 헨리 루이스와의 관계가 초래할 스캔들을 피하고자 했다고 생각된다.

엘리엇의 미들마치는 소설가 마틴 에이미스와 줄리언 반스가 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생애

영국 워릭셔 너니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로버트 에번스(1773-1849)와 지역 공장주의 딸 에번스(결혼 전 성씨는 피어슨, 1788-1836)의 세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메리 앤의 이름은 가끔 메리언으로 축약되기도 한다. 그녀의 형제자매들은 크리시로도 알려진 크리스티아나(1814-59), 아이작(1816-1890)과 1821년 3월에 태어나 며칠 안되어 요절한 두 쌍둥이 형제가 있다. 또한 그녀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전처 해리엇 포인턴의 딸로 그녀에게는 이복오빠가 되는 로버트(1802-63)와 이복언니 페니(1805-82)가 있다.

아버지 로버트 에번스는 웨일스 혈통으로 워릭셔의 뉴디레이트 가문의 아버리 홀 토지 관리인이었으며, 메리 앤은 사우스 팜에 있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1820년 초 가족들은 너니턴와 베드워스 사이의 그리프 하우스라는 이름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

어린 에번스는 독서에 열중했으며 지적인 아이였다. 육체적으로 아름답다고 보이지 않은 까닭에, 그녀는 본인 스스로 결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요인들과 그녀의 총명한 지능은 아버지로 하여금 당시 여자들은 보통 받지 못한 교육을 그녀에게 해주게끔 한다.

5살부터 9살까지 그녀는 언니 크리시와 함께 아틀버러에 있는 미스 라텀 학교에, 9살부터 13살까지는 너니턴의 월링턴 부인 학교에서, 13살부터 16살까지는 코벤트리의 미스 프랭클린 학교에서 기숙 생활을 했다.

월링턴 부인 학교에서 그녀는 복음주의적인 마리아 루이스ー현존하는 엘리엇의 편지 중 가장 초기의 것들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이다ー에게 교육을 받았다. 프랭클린 부인 학교의 종교적 색채 속에서 엘리엇은 복음주의와 반대되는 엄숙하고 통제 잡힌 믿음에 노출되게 된다.

16살 이후로 엘리엇은 공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 아버지가 관리하던 영지 안에서 아버지가 누리던 중요한 위치 덕에 엘리엇은 학식을 넓히며 독학할 수 있게끔 큰 도움을 받게 될, 아버리 홀 도서관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녀의 고전 교육은 정점을 찍었다. 크리스토버 스트레이는 “조지 엘리엇의 소설들은 고대 그리스 문학에 심히 빚지고 있으며 (그녀의 소설 중 단 하나의 소설만이 그리스 문자 활자 없이 제대로 출판이 가능하다) 그녀의 주제는 보통 그리스 비극에서 영향을 받았다.”라고 말한다.

엘리엇은 그 토지를 자주 방문하면서, 마을에 사는 지주와 가난한 이들 간의 빈부 격차와 그녀의 여러 작품들에서 재현될, 다양한 대비되는 삶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삶에 있어 다른 중요한 초기의 영향은 바로 종교였다. 그녀는 국교회 저교회파 가족으로부터 태어났으나 당시 미들랜즈는 비국교도의 수가 증가하던 지역이었다.

코번트리로의 이사

1836년 에번스의 어머니가 사망하자 에번스는 (당시 16살) 가정 살림을 맡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을 가르치던 마리아 루이스하고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녀가 21살이 되자 오빠 아이작은 결혼하며 집을 차지했다. 그래서 에번스와 그녀의 아버지는 코번트리 근처 폴실로 이사를 가게 된다.

코번트리 지역 사회와 가까이 지낸 결과, 특히 찰스와 카라 브레이가 그녀에게 새로운 영향을 끼쳤다. 찰스 브레이는 리본 제조업자로서 부유해졌고 이렇게 모은 부를 학교 건물을 짓는다던가 하는 자선적인 일들에 사용했다. 가끔씩 종교적인 불신에 흔들리던 에번스는 급진적인 자유사상가인 브레이 부부와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는데, 브레이 부부네 “로즈힐” 저택은 바로 급진적인 관점을 갖고 논쟁하던 이들에게 천국과도 같았던 곳이다.

이 젊은 여성이 브레이 부부네 집에서 만난 사람들로는 오언, 스펜서, 마티노, 에머슨과 같은 이들이 있다. 이러한 이들을 통해 에번스는 더 자유적이고 불가지론적인 신학들을 접하게 되었고 성경 이야기가 말 그대로 진짜 사실인지 의심하던 스트라우스나 포이어바흐 같은 작가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엘리엇의 첫 주요 문예 작품은 ‘로즈힐 서클’의 다른 구성원들이 번역을 하다 만 것을 그녀가 끝낸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1846) 영어 번역이라 할 수 있겠다. 훗날 그녀는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 (1854)을 번역하게 된다. 우정의 산물로 브레이는 엘리엇이 초반에 쓴 논평 등의 글 몇 편을 자신의 신문 <코번트리 헤럴드 앤 옵저버>에 실는다.

엘리엇이 자신의 종교적 신앙심에 관하여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 엘리엇의 아버지는 그녀를 집 밖에 내쫓아버리겠다고 위협했으나 이 위협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공손히 교회를 다니며 아버지를 위해 1849년 그녀가 30살이 되고 아버지가 사망할 때까지 집을 지킨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거행된 날로부터 5일 후 그녀는 브레이 부부와 함께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제네바에 혼자 머물기로 결정하며, 먼저 플롱종에 있는 호숫가에 살다가 (현재 유엔 건물 근처) 이후로는 그녀의 친구 프랑수아와 쥘리에 달베르 뒤라르가 소유한 샤누안 로 (현재 펠리세리 로)에 위치한 저택 2층에서 살게 된다.

그녀는 기뻐하며 “좋은 고목 위에 있는 폭신한 둥지에서 느끼는 것”같다며 말했다. 그녀가 이곳에 머문 사실은 건물 헌판에 기념되어 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엘리엇은 열심히 책을 읽으며 그녀 자신에게 큰 영감을 준 아름다운 스위스 시골을 산보했다. 프랑수아 뒤라드는 그곳에서 엘리엇의 초상화를 그려주기고 했다

런던으로의 이사와 <웨스터민스터 리뷰>의 편집자일

같은 해에 잉글랜드로 돌아온(1850) 엘리엇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런던으로 이사를 갔으며 그곳에서 자기 자신을 메리언 에번즈라 불렀다.

엘리엇은 전에 로즈힐에서 만난 급진적인 출판업자이자 그녀의 슈트라우스 번역을 출판해 준 존 채프먼의 집에 머물렀다. 채프먼은 행동하는 좌파 신문 회사 <웨스터민스터 리뷰>를 얼마 전에 샀었고 에번즈는 1851년에 보조 편집자가 된다. 채프먼이 공식적으로는 편집자였지만 실질적으로 신문을 출간하는 작업을 하며 1852년 1월 자부터 많은 수필과 논평을 기고하고 1854년 중반에 <리뷰>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 일한 이는 에번즈였다.

엘리엇은 대륙 유럽에서 벌어진 1848년 혁명이 공감하였고, 그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점진적인 개혁 방안이 잉글랜드에 있어 최선이라고 믿은 것과 대조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이 “나쁜 오스트리아인”들을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내며 “쇠락한 군주정”들 역시 폐기 처분되길 희망하였다.

당대 여성 작가들은 흔했었지만 문예 잡지 여성 편집자로서의 에번즈의 역할은 드물었다. 이 시기 엘리엇은 채프먼(결혼했으나 아내와 정부와 함께 살던)과 허버트 스펜서에게 일방적인 애정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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