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자유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완벽이 아닌, 적당한 적응을 목표로 진화해 왔다. 그 이유는, 진화가 완벽을 목표로 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뜻 완벽한 생물학적 설계가 더 나아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상태가 시간, 에너지, 그리고 자원 측면에서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다. 완벽한 진화가 불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생명체라도, 환경이 바뀌면 그 적응은 오히려 생존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반면에 적당한 적응은 환경 변화에 대비하는 유연성을 제공한다. 또한, 완벽한 적응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생명체는 여러 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특정 기능을 완벽하게 만들면 다른 기능이 반대로 약해지기도 한다. 이는 생명체가 가진 에너지와 자원의 한계 때문이다. 진화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완벽”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시각에서 후대적으로 부여한 해석일 뿐, 진화 그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 역시 완벽한 진리를 탐구하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존과 관계 유지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는 경향을 지닌다. 사회적 조화, 신뢰, 그리고 소속감이 이와 직결된다. 인간은 고립된 개인으로써 보다, 집단 속에서 생존 확률을 훨씬 더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는 제한된 정보 처리 능력을 갖고 있다. 완벽한 진리를 파악하려면,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며 이 과정은 불확실성을 수반한다. 진화의 관점에서 이러한 과도한 자원 소비는 다른 생존 활동을 희생하게 만든다.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그건 생존의 부산물에 가깝다. 궁극적인 진리를 찾으려는 욕구는 생존에 필수가 아니기에, 우리는 휴리스틱과 편향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의 자아가 상대적인 이유는 경험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생각, 감정, 기억, 그리고 가치관은 시간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자아는 뇌 속 신경망의 활동 패턴이며, 그 패턴은 주변 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절대적일 수 없다. 자아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와 사회적 맥락 안에서 다르게 드러나고 재구성된다. 가족, 친구, 문화, 사회 규범 등에 따라 내가 인식하는 “나”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자아의 많은 부분은 무의식적이고, 의식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나”는 전체의 일부일 뿐이다. 따라서 자기 인식은 제한적이고 불완전하며,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진리의 후천적 기원 생물학적 관점으로 봤을 때, 우리가 추구하고 갈망하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진리는 후천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진리 추구 자체가 환경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존과 적응을 위해 발달된 인지 메커니즘의 일부인 것이다. 이런 진리의 개념은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정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문화, 언어, 사회적 상징체계와 함께 후천적으로 형성된 인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진리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안정감을 얻고 혼란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낸 심리적 도구이거나, 인지 한계에서 비롯된 개념일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본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함을 추구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이 마음속 심리나 정신적 요소와 결합하면서 외부로 표현될 때, 우리는 그것을 가치나 의미로 해석한다. 결국 이런 과정이 쌓여 신앙이나 이상처럼 더 높은 차원의 경험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의 본질이 결핍과 고통이라고 주장했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으면 고통을 낳고, 채워지면 지루함을 낳는다. 인간은 결핍, 충족, 지루함, 새로운 결핍의 영원한 윤회 속에 갇혀 있다. 이는 끊임없이 갈망하는 의지에 의한 것이다. 결핍이 없다면 변화도, 의미도, 성장도 없다. 완전한 존재는 더 이상 욕망하지 않기 때문에 움직일 이유가 없다. 인간이 움직이는 이유, 즉 “존재”가 전개되는 이유는 결핍 그 자체 때문이다. 나는 생존과 경쟁의 개념이 서로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한다. 경쟁력을 확보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고, 경쟁이 존재하지 않으면 생존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자원이 풍족할 수 없고, 모든 생명체가 공평하게 살아갈 수 없는 이유는 경쟁하기 때문이다. 이 경쟁은 불완전함의 결과이고, 무엇보다 인간은 이 불완전함을 더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끼며 벗어나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경쟁은 때론 불완전함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불완전함을 조작하려는 착각을 강화시킨다. 불완전함은 달콤한 마약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제의 환상에 빠져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영원히 고통받는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착각은 결과적으로 더 많은 불안과 스트레스를 초래한다. 이와 반대로, “신”이나 “운명”과 같은 외부적 용인에 불완전함과 책임감을 전가하는 행위는 자신을 인식하고 인정하여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책임의 회피가 아닌,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완벽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과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스스로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 완전한 존재에 수렴하는 것이다.
1. 기억, 성향, 신체 변화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2. 의식은 단순히 뇌 신호의 부산물인가, 아니면 독립적 존재인가?
3. 인간 내면에 서로 다른 자아가 존재한다면, 책임과 자유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인간 존재와 자아 정체성의 근본적 문제를 탐구한다.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무의식의 선택과 환경적 영향에 따라 행동한다. 현대 신경과학은 의식을 뇌 신호와 뉴런 활동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뇌 신호가 곧 의식 그 자체는 아니다. 마치 원자의 개념으로 물질을 이해한다고 해서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의식도 뇌 신호를 통해 이해될 수 있을 뿐, 그 경험적 실재는 여전히 존재한다. “의식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하드 문제 (Hard Problem of Consciousness)와 맞닿아 있다. 하드 문제란 주관적 경험 자체가 생기는 원리와 이유를 묻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목적이나 이유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후천적 해석의 산물이다. 존재 자체에 대해 “왜?”를 묻는 순간, 인간 인식의 한계, 즉 존재론적 한계와 마주하게 된다. 의식은 존재하지만, 그 존재 이유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리는 그 한계를 체험하게 된다.
자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과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변화가 곧 자아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테세우스의 배 문제와 마찬가지로, 배를 구성하는 모든 목재가 바뀌어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정의한다. 인간 자아도 환경과 경험에 따라 변화하고 영향을 받지만, 개념적 정의가 유지되는 한, 자아는 동일하다. 다중 자아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일부 내적 자아가 다른 선택을 하거나 성향이 바뀌어도, 전체 자아를 정의하는 근본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책임과 자유 역시 그 정의를 기준으로 판단될 수 있으며, 부분적 변화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자유와 책임, 의식과 자아 정체성 문제는 연속성과 개념적 정의를 기준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의식적 선택과 환경적 변화는 우리의 경험적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이 “나”를 정의하는 근본적 구조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정의하고 경험하며, 그 정의를 중심으로 자유와 책임을 행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은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연속성과, 변화를 포용하면서도 유지되는 자아의 개념적 틀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진짜”라고 믿는 순간, 그 믿음 자체가 새로운 현실처럼 뇌에 각인되는 경험을 한다. 이는 기억 재구성 (Memory Reconsolidation)의 과정과 관련이 있다. 인간의 기억은 단단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회상될 때마다 다시 재구성되며, 믿음이나 감정과 결합해 강화된다. 그래서 한 번 믿어버린 생각은 반복 회상을 통해 점점 실제 경험처럼 자리 잡아 버린다. 즉, 스스로 만든 믿음은 “현실”이 된다. 바로 이 구조 때문에 착각이나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어려운 것이다. 새로운 정보가 기존 믿음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는 심리적 불편을 유발하고, 뇌는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해 오히려 기존 믿음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믿는 것을 강화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반대되는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 편향 (Confirmation Bias)에도 취약하다. 어떤 믿음은 자기 정체성 (Self-Identity)과 연결되어 있어, 이를 버리는 것이 마치 자신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바로 이런 구조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간다. 믿음은 기억을 재구성하고, 기억은 현실을 형성하며, 현실은 다시 새로운 믿음을 강화한다. 우리가 믿는 것을 현실로 만드는 힘,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계다.
인간의 무의식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잠재력은 새로운 가능성과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무한성을 품고 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상상하고 믿는 것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무의식의 힘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키고 확장하는 창조적 원천이 된다. 우리는 자신이 진짜 세계를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각자의 뇌가 조용히 편집한 세계 속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진짜 현실에 살고 있나? 아니면 스스로 만든 현실에 살고 있나?
몰아치는 파도의 깊은 의식은 고요하다. 거울 속 내면의 자신은 객관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은 목적성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에 주관적이다. 본성적 교만과 이기심은 무의식의 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서도 반대로 향하고 있다. 넓은 우주에는 빛과 어둠이 존재한다. 우리는 어둠으로 나아갈 때도, 뒤돌아서면 항상 빛이 있는 것을 안다. 행복은 간단하면서도 가장 어렵다는 것이 이런 것 같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빛이 다시 우리 뒤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항상 우리의 뒤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현재에 살아야 행복하다는 것은 빛을 찾아 어둠으로 나아가지 말고, 그 자리에서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행복과 사랑은 감정에 불과하지 않는다. 의지와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어야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다. 그래야 매 순간 행복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에 있는 이 빛이 사랑이라면, 우리는 사랑을 찾기 위해 어둠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둠 속 어딘가 사람이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안다.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왜 그 자리에서 행복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자꾸 어디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행복과 사랑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 같다. 항상 현재에 살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텐데. 인간과 신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할수록, 때로는 두려운 생각들이 밀려들어 왔다. 내면의 무의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는 일이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신앙마저 내려놓고 다시 돌아보았다. 그 과정에서 나의 사고는 충돌하고, 점점 양극성을 띠며 명확해졌다. 솔직히 말해 미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을 줄이고 단순하게 살아간다면 인생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성경의 하나님이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인간 존재의 가치조차 불분명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라는 말은 이기적인 위안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본성과 합리화,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서로를 의심한다. 신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상호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의 나는 오직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진정한 가치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이기적인 자아의 선택 없이는 사랑의 시작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의지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것을 단순히 생물학적 본능으로 환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남을 돕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결국 이기적인 이타심에서 비롯된 역설적인 마음인 것일까? 이것이 단순히 개인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함일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며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희생적 사랑이 실현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닌 이상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 내면을 솔직히 탐구하며, 사랑과 행복, 이기심과 이타심, 신의 존재와 의미를 스스로 깨닫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수많은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 다양한 감정과 생각은 관측 전의 양자 상태처럼 중첩되어 있다. 결국 이것은 자유의지라는 방향성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사랑을 선택하는 데에 그친다면 혹은 신을 믿는 선택을 하는 데에만 그친다면 진정으로 자유롭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신앙을 어릴 적부터 반복적으로 접해 온 교육이나 환경의 영향이 아닌, 오직 나의 주체적 경험에 기반하여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어쩌면 이 지점에서 철학과 심리학에 관한 관심이 싹튼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하나의 역설이 발생한다. 신앙이 주관적 판단에 기초한다면, 그것이 단지 심리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현상이 아니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신의 개입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의 주관적인 자아이다. 하지만 이것이 자기 완결적 해석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