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 코딩 공부 해야 하나요?
지클제(ChatGPT, Claude, Gemini)와 같은 생성형 AI가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나타난 가장 흥미로운 변화 중 하나는 AI를 '고민 상담가'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운전하며 AI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누고, 또 누군가는 퇴근 후 AI에게 하루의 소회를 털어놓는 것으로 일과를 마무리한다.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유튜브에는 'GPT로 한 달 안에 외국어 마스터하기' 같은 콘텐츠가 넘쳐나고, '스픽(Speak)' 같은 서비스는 AI 개인 튜터를 통해 언어 학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바야흐로 외국어를 배우기에 이보다 더 좋은 시대는 없다.
다음 달 미국 학회 출장을 앞두고, 함께 가는 석사 학생은 영어로 하는 첫 발표 때문에 고민이 깊다. 발표 자체도 걱정이지만 특히 질의응답이 공포란다. 나는 학생에게 발표 내용을 녹음해 AI 채팅창에 올린 뒤, 저명한 미국 교수의 퍼스널리티를 부여해 모바일 음성 채팅으로 질의응답 연습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과거였다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들이 지금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외국어를 전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 역시 빛의 속도로 구축되고 있다. 구글 미트(Google Meet)의 '실시간 번역 자막'이나 줌(Zoom)의 'AI 컴패니언'은 온라인 미팅 중 상대의 말을 내 모국어로 즉각 번역해 준다. 이제 모니터 너머의 외국인과 대화하기 위해 밤새 단어를 외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을 보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이제 영어 공부 안 해도 된다"는 예찬론자들과 "영어 공부하기 정말 좋아졌다"는 학습론자들이다. 이 논쟁은 고스란히 '코딩'의 영역에서도 유지된다. 자연어로 대화하며 코드를 짜는 '바이브 코딩'의 시대가 왔으니 원리를 배울 필요가 없다는 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딩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쪽이 팽팽하다.
생각해 보면 답은 명확하다. 바이브 코딩으로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서비스의 대상이 1만 명, 10만 명으로 늘어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스템의 부하를 견디고 알고리즘의 효율을 따지는 최적화의 영역은 현시점에서 시스템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구현하기 어렵다. 바이브 코딩에서 가장 중요한 건 AI가 알려주는 대로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며 내 지식으로 흡수하는 학습의 과정 그 자체다. 즉, 코딩을 배워야 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내가 AI를 활용해 어떻게 성장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최근 바둑계에서는 신진서 9단과 10년 전 이세돌 9단을 꺾었던 '알파고 리(AlphaGo Lee)'의 재대결 이벤트가 논의 중이라는 흥미로운 소식이 들려온다. 물론 서로 다른 레이팅 시스템을 사용하는 인간과 AI의 실력을 수치로 직접 비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하지만 바둑계의 상대적 지표들을 종합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현재 최강의 AI인 '절예'나 '카타고'는 독학으로만 신의 경지에 올라 약 5,000~5,500점 이상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보여준다. 36시간 만에 알파고 리를 넘어섰던 '알파고 제로' 역시 5,000점을 넘긴다. 수치상으로만 보면 인공지능은 이미 인간이 도저히 넘볼 수 없는 영역에 안착해 있다.
하지만 진짜 주목해야 할 지점은 그 다음이다. 10년 전 인류에게 공포를 안겼던 '알파고 리'의 당시 실력은 현재 지표로 환산 시 약 3,700~3,800점대로 추정되는데, AI를 스승 삼아 치열하게 연구해 온 '포스트 알파고' 세대의 선두 주자, 신진서 9단의 현재 점수는 이를 상회하는 3,900점대에 육박한다. 10년 전 우리가 경외심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던 그 '무적의 기계'를, 이제 인간이 학습을 통해 따라잡고 있다는 뜻이다. 신진서 9단은 AI가 제시하는 정답을 무작정 외우지 않았다. "AI는 왜 여기서 이 수를 두었는가"를 묻고, 그 원리를 인간의 언어로 재해석하며 자신의 한계를 돌파했다. 그 '배움의 발버둥'이 있었기에 인간도 인공지능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나오니 이제 아무것도 안 해도 되겠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훗날 빅테크의 자본력과 국가의 세금으로 제공될 '기본 소득'만 바라보며 평생 놀고먹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같다. 고대 로마 시대, 계속된 정복 전쟁으로 값싼 노예 노동력이 과잉 공급되자 시민들의 노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곡물을 무상 배급하고 콜로세움에서 자극적인 '빵과 서커스'를 제공했던 이유는 단 하나, 유휴 시민들의 불만이 폭동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카이스트 김대식 교수의 말처럼, 미래의 국가가 전 국민에게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무제한 구독권을 주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디지털 서커스'에 매몰된 삶을 과연 주체적인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사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조급하다. 밤에 잠을 청하려 누웠다가도 새로운 인공지능 소식이 들려오면 다시 노트북을 연다. 따라잡지 못하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 소외될 것 같은 불안감에 '포모(FOMO) 증후군'과 '인공지능 피로'를 겪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번아웃이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해도 괜찮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다시 외국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구글 글라스 같은 기기가 나와서 상대의 영어를 한국어로 즉시 통역해 준다 해도, 내가 직접 언어를 구사하는 것과 기계를 거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언어 모델은 본질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미지 생성 모델인 '나노바나나'를 예로 들어보자. 아무리 정교한 LLM 기반의 프롬프트를 입력해도, 오직 텍스트만으로는 내가 머릿속에 그린 완벽한 그림을 얻기 어렵다. 결국 내가 원하는 구도와 질감을 가진 비슷한 그림을 예시로 제공하는 '퓨샷 러닝(Few-shot Learning)'이 병행되어야만 결과물은 비로소 완성에 가까워진다.
인간의 대화도 이와 같다. 우리가 주고받는 ‘말’, 텍스트는 소통의 아주 일부분인 프롬프트에 불과하다. 0.1초의 지연 없이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할 때 느껴지는 미세한 눈빛의 흔들림, 표정의 변화, 손짓 하나하나가 사실은 소통의 정확도를 높여주는 결정적인 '퓨샷 데이터'들이다. AI가 아무리 유창하게 번역을 해준들, 모니터를 사이에 둔 기계적 통역은 이 핵심적인 비언어적 정보들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의 공기, 그 팽팽하거나 혹은 따스한 물리적 교감까지 AI가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수단이 아니라 '생각의 근육'이다. 내가 직접 할 줄 알아야 AI가 내뱉는 수많은 말 중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각인지 판단할 수 있다. 기술이 완벽해질수록, 그 기술을 부리는 인간의 판단력과 주체성은 더욱 소중해질 것이다. 결국 우리가 AI 시대에도 멈추지 않고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기계의 노예가 되어 '디지털 서커스'에 만족하는 로마 시민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다. 노트북을 다시 여는 나의 이 피로감은,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주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치열한 발버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