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컬로이드를 아시나요
지난 주말부터 온 집안에 장염이 돌고 있다.
막내가 유치원에서 데리고 귀가한 장염 바이러스 덕분에 막내- 나-첫째-둘째 순서대로 도미노처럼 쓰러졌다가 회복되어가고 있는 중. (왜 때문에 남편만 세이브일까..?)
넷 중 가장 직격탄을 맞은 건 평소 최강 면역력을 자랑하던 우리 집 틴에이저 첫째인데, 첫째는 이틀 내내 침대와 화장실 사이를 오가더니 고새 볼살이 쏙 빠졌다.
학교도 유치원도 안 가고 네 명이 한 지붕 아래서 지지고 볶고 있자니 아이들도 힘들었겠지만 엄마의 스트레스도 장난이 아니다.
주말부터 몇 통의 이불빨래, 커튼과 속옷 빨래, 장염 환우님이 지나다닌 길과 화장실은 비닐장갑과 마스크를 끼고 알코올 소독액을 뿌리고 닦기, 죽 쑤기, 병원 데려가기, 간호하기.
원래 집안에 환우가 계시면 엄마의 역할이 화려해지는 법, 몸도 마음도 지치며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러. 나! 사실 제일 참을 수 없는 복병은 빨래도 세끼 밥도 간병도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J pop의 한 장르로 일본 초딩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보컬로이드, 줄여서 보카로.라고 하는 음악들은 야마하에서 개발한 보컬 프로그램. 즉 인간이 아닌 AI가 탑재된 음성프로그램이 부르는 음악들이다.
처음 우리 집에서 이 음악들이 들리기 시작했을 때, 네가 좋아하는 음악은 엄마도 좋아할 준비가 되어있어, 라며 열린 마음으로 다가섰다가 큰코다치고 한 발 물러난, 그것 차암 내 취향은 아니었던 음악들이다.
보통 매우 빠른 비트와 복잡한 코드에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하이톤의 소년 보이스 (매우 시끄럽고 정신없는 음악들….이라고 하자니 내가 진짜 꼰대 같아서 쉿!)
빠르게 변화하는 자극적인 애니메이션 영상을 동반하는 뮤비들은 수천만 뷰를 찍고 있을 만큼 일본 내에서는 젊은 세대들의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그러나 어딘가 덕후 스멜이 풍기기도 하는 음악들이기도 하다.
저녁 식사시간에 이 정신 산만한 음악들을 빵빵 틀어대는 것만도 오 엄마 체하겠다 제발 그 음악들 좀 저리 치워,라고 맘스터치(등짝스매싱)를 날리고 싶은 충동을 꾸욱 참으며 지내고 있는데, 장염주간 내내 저 음악들을 평화로운 나의 거실에서 듣고 있어야 한다니 오 마이갓.
그러나,
꼰대가 되기 싫은 틴에이저 엄마는 오늘도 참는다.
이 정신산만한 음악들을 이해하는 게 너를 이해하는 것이겠지.
너의 질풍노도의 당황스러운 호르몬들이 사랑하는 음악이니 그러려니 해야지 뭐.. 엄마 고막이 찢어지기 밖에 더 하겠니.
- 영상은 그나마 들어줄만한(?) 보컬로이드 곡
- 사진은 하라주쿠와 오므라이스를 사랑하는 우리 집 틴에이저의 뒷모습
- 세상의 모든 틴에이저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