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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낭아 May 17. 2023

정철 가문의 저주


정철의 족질 정인원이 정철에게 말했다.

“숙부님, 강사상 대감이 정사에 참여하면서 말 한마디 않더니 영의정이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더욱 말이 없고 코만 만지더니 말입니다. 숙부님은 어찌 그리 모가 나 이 궁색입니까? 입 좀 다물고 코만 만지다가 높은 자리에 올라 우리 가문 좀 일으켜 보십시오.” <<석담일기>> 율곡 이이 저.


<<선조실록>>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선조 11년(1578년)  11월 1일 

강사상(姜士尙)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삼다.

강사상이 시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경연에 들어갈 때마다 부복하고서 졸았는데 어떤 때는 코를 골기도 하여 옆 사람이 깨워도 다시 졸곤 하였다. 

그래서 물러나와 동렬에 있는 사람들이 질책하면 사상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태평스런 기상이 아닌가.”

하였다. 

그는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술에 취하고 나면 다시 벙어리처럼 앉아서 손으로 코만 만지고 있었다. 

그가 정승에 제수되자 정철의 족질 정인원이 술을 가지고 와서 정철에게 권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까지 고달프게 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숙부께서는 삼가 입을 다물고 코나 만지시다가 정승이 되어서 곤궁한 우리 일가를 좀 살게 해주소서.”

하니 사람들이 듣고 웃었다.



선조 11년 무렵의 정철의 상황은 어떠한가 알아보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동서 분쟁에 휘말려 체직되었고, 낙향하여 <성산별곡>을 짓고 있었다.

정철의 족질 정인원이 ‘곤궁한 일가’라고 한 내용을 살펴보려면 정철의 외가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안팽수는 집이 해주인데 노친을 봉양하고 있어서 연안부사를 희망해 부임했다.

한 사람이 개인감정을 가지고 어떤 양인 삼부자를 거짓으로 얽어 도적으로 몰아 고관했다.

안부사가 술에 취해 아전들에게 심리하라 넘겼다.

아전들은 뇌물을 받고 죄 없는 삼부자를 죄인으로 몰아 매를 쳐 죽게 했다.

황해감사 김안국이 보고를 받고 재조사하니, 삼부자가 원통하게 죽은 것이었다.

안부사에게 책임을 물어 부사직에서 파면시켜 해주로 낙향했다.

1519년 이후, 안팽수는 무고한 파면을 당한 명부에 올라 예조참의에 제수된다.

해주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다가 연안 관아에서 하룻밤 묵었다.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었다. <<사재척언>> 김정국 저.




안팽수는 성종 23년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쳐, 중종 12년(1517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이 기사 아래에 사관의 사견이 있다.

‘사신은 논한다. 안팽수는 술에 빠지고 궤변이 허탄하므로, 본래부터 사람들이 가볍게 여겼는데, 관찰사로 낙점 되니 기롱하는 사람이 많았다.’


얼마 후에 대간이 “황해도 관찰사 안팽수는 한 지방을 맡기에 합당하지 못 한데다가 해주에서 생장하여 부모와 족친들이 모두 그곳에 삽니다. 해주에 관청이 있으니 오래 있으면 폐단이 장차 적지 않을 것이니 체직하소서.”

하고 청하니 중종이 재임명하라 명했다.

하여 안팽수는 연안부사로 갔다.

감사직에서 부사직으로 강등되었으니 위 설화 내용처럼, 울분이 나서 과음 했을 것이다.

2년 후인 중종 14년에 황해도 관찰사 김정국이 장계하기를,

“연안 부사 안팽수는 용형이 지나치게 혹독하여, 백성을 다스리기에 마땅하지 않으니 교체하소서.”

설화에는 김안국으로 되어 있지만, 김정국은 그 아우이고, <<사재척언>>을 쓴 사람이 김정국인 것을 보면, 자신의 책에 자기 이름을 써 넣기가 민망했나 보다.

그리고 8년 후, 안팽수를 가자(加資 - 품계를 올리는 일) 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사가 끝이다.

설화의 내용처럼, 원통하게 죽은 삼부자의 원한으로 안팽수가 객사한 것일까?


안팽수의 외손자가 바로 정철이다.

정철의 누나가 중종 세자(인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는데, 인종이 즉위 9개월 만에 병사하여 과부가 되었다.

또 다른 누이는 계림군과 혼인하였는데, 계림군은 을사사와 때 역모에 연루되어 죽었다.

(명종 즉위 후, 문정대비가 인종의 숙부인 윤임 일파를 죽이려고 하는데, 대신들은 유배형으로도 족하다고 했다. 그래서 문정대비는 판을 더 키워 ‘윤임이 계림군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고 무고하여 처형했다)

정철의 형 정자는 정랑이었는데 을사사화 때 붙잡혀 계림군의 숨은 곳을 대라는 고신을 당하고 광양에 유배되었다. 2년 후인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문정대비가 윤임의 남은 세력을 싹 쓸어낸 조작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경원으로 이배되는 도중에 사망하였다.


계림군의 장인 정유침도 유배되었는데 열 살의 정철도 부친을 따라 유배지에 갔다.

명종 6년(1551년) 순회세자 탄생 때 사면되었고, 형 정자는 선조 1년(1567년)에야 신원되었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정철은 김인후·기대승에게서 수학하였는데, 기대승은 그의 지조를 칭찬하였다. 

명종 17년에 정철이 장원급제하자 명종이 기뻐하며 특별히 주찬을 내리라고 명했다.

정철이 어릴 때 누나를 만나러 동궁(東宮)에 드나들었는데, 경원대군(명종)이 정철과 놀이하면서 매우 가깝게 지냈었기 때문이었다. (정철 1536년생, 명종 1534년생. 10세 이전)

하지만 정철이 주찬을 사양했다. 

이에 명종은 주찬을 중지시키고 정철을 신무문으로 나가도록 명한 뒤 누대 위에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고 전한다.


명종 21년 4월 13일에 경양군 이수환이 처가의 재산을 빼앗으려고 서얼 처남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헌부가 이 사건을 논계하자 명종은 정철에게 사건무마를 요구했는데, 정철이 그렇게 하지 않아 파직되어 낙향하였다고 <<선조실록 수정본>>에 기록되어있다. 


(인조 때 수정된 <<선조실록 수정본>>에서는 광해군 때 이이첨 등의 대북 세력이 쓴 <<선조실록>>의 기록이 악의적이라며 수정한 내용이 많다)


이 과정을 선조 때 쓴 <<명종실록>>에서 살펴보면. 

4월 25일에 조사관이 경양군 이수환의 살인죄가 확실하다고 결안을 청했다. (결안-사형죄로 결정할 문서) 

이에 명종은 사형을 거부했다. 

사헌부에서 계속해서 이수환을 율대로 치죄하자고 청을 하니, 

명종은 4월 28일 사헌부에 대거 인원 교체를 실시한다.

오상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강사필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이인을 사헌부 집의로, 민시중을 사간원 사간으로, 이기(李墍)·이충작을 사헌부 장령으로, 유전을 홍문관 부응교로, 김명원·정철을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사헌부에서 계속해서 이수환을 율에 의해 처리하자고 하니, 

명종은 이수환 부자가 병이 있다며 보석하라 명했다가 거부되어 철회한다.

그러다가 5월 11일에 이수환이 옥사하였다.

그리고 정철은 9월에 병조 정랑으로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함경도 납의경차관으로 가게 된다.


선조 즉위 때 정철은 홍문관 수찬으로 기용되어 관직과 낙향을 반복한다. 

동서 붕당이 되자 서인에 가담하여 여러 번 탄핵되었지만, 선조가 막아 주었다.

하지만 결국 동인의 논척 대상이 되었고, 낙향하였다.

선조에게 바른말을 자주 하던 정여립이 대역죄로 고변되자, 

정철은 위관인 정언신을 밀어내고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일으켜 동인계를 싹 쓸어낸다.


선조 22년 12월 호남 유생 정암수 등 50 여명이 상소를 올렸는데, 

‘이산해·유성룡·나사침·나덕준·정인홍·정개청이 정여립과 뜻을 같이 했으니 퇴진시켜야 한다.’

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유성룡과 이산해를 위로했다.

이 상소의 배후에 이산해를 제거하려는 정철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이산해는 복수의 마음을 품었다.


선조 24년 초, 정철이 유성룡과 이성중과 이해수와 시사를 논의 했다.

“지금 제일 시급한 일은 세자를 세우는 일입니다.”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니 정철은 이산해에게 이 말을 전했다.

“그래요? 함께 모여 논의해 봅시다.”

하여 날짜와 장소를 잡았는데 이산해가 나오지 않았다.

이성중은 일이 지체된다고 여겨 채근했다.

“우리끼리라도 시사(時事) 12조를 논의하고 주상께 올릴 차자를 씁시다.”

“아무래도 이산해가 수상합니다.”

과연 이성중은 충청감사로 이해수는 여주목사로 발령이 났다. 

(이것이 건저사건인데,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정철과 인빈김씨의 신성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선조 사이의 갈등을, 이산해가 이용하여 정철을 무고한다) 

정철은 선조의 미움을 받게 되고, 양사가 정철의 파직과 유배를 청하자 선조는 허락한다.

그리고 방을 붙여 전국에 알리게 하고, 정철의 사람들을 다 쫓아낸다.


선조는 정철을 앞세워 기축옥사로 동인을 다 제거하고, 건저사건으로 서인계도 제거한 것이다.


임진전쟁이 터지고 몽진을 주장하던 이산해가 삭직되자 정철이 불려와 선조의 몽진을 호종했다.

1593년 선조 26년 5월에 평양·개성·한양을 회복하자 정철이 사은사로 파견되었다. 

그런데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 송응창이 ‘왜적이 모두 바다를 건너 도망갔다’고 본국에다 거짓 보고를 했다. 

정철은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다.

“사신으로 간 정철은 송응창의 말이 사실이 아니고 아직 전세가 위급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선조는 정철을 체직시키고 다시 조사하라 명했는데, 나머지 사신들은 무사했다.

그리고 소문이 나기를,

“정철이 북경에 가서 주상의 과실만을 은밀히 중국 조정에 전파시켰다. 그러므로 황제 칙서 속의 추한 말들은 모두가 그로부터 나온 것이다.”

정철은 강화에 우거하다가 술병으로 59세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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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왕기 서린 도읍지 9

고려 의리남 최원도 16

김득배 사위 조운흘 18

조선에서 즉위년칭원법을 쓴 왕들 20

 『고려사』에는 왜? ‘금을 버린 형제’ 설화가 수록되었을까? 21

 조선 꿀팔자 개국공신의 후손 23

맹사성을 꾸짖은 박안신 26

조선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 32

대가 끊기고도 남아 있는 성삼문의 신주 34

우렁각시와 박팽년의 손자 38

명나라 사신들의 갑질 42

혼인 장사로 부귀를 누린 한확 48

대를 이은 절개, 정몽주의 자손들 50

삼막사 고양이와 새끼 호랑이 51

살생부가 된 문서들 54

연산군에게서 생과 사가 갈린 이들 62 

해먹을 결심 영남 3맹호 73

벗의 죽음을 슬퍼하다 죽은 윤결 76

보쌈 당해 죽을 뻔한 홍섬 78

은혜를 원수로 갚은 심정과 점사 홍계관(洪繼灌) 82

성현 외숙과 순흥 안씨 가문 86

안당 가문의 저주 90

남곤의 미움을 산 이들 93

불운의 끝판 공회빈 윤씨 97

조카를 무고하여 죽게 한 최세절 99

부친의 음덕으로 수명을 늘린 윤두수 101

의리의 폭탄 제거반, 이황과 김인후 103

다른 길을 걸은 형제들 107

명종 때의 척신 3흉 113

악인이 될 결심 115

정철 가문의 저주 123

명종의 지명 없이 왕이 된 선조 128

붕당의 시작, 김효원 대 심의겸 130

원사안의 경귀석과 삼척부사 김효원 132

저승에 가서 정혼자를 데려온 양세륜 136

인빈 김씨의 남자들 140

비판시를 짓다가 죽음을 당한 권필 145

꿈속의 낭군 정효준 146

용의 음덕을 입은 김육과 점사 홍계관(洪啓寬) 149

들쥐결혼 설화와 구수영의 후손 154

인조반정 타임라인 157

귀여운 적폐 능원군 168

시(詩) 망한 유몽인 171

염라왕 김치 173

한준겸과 귀신점호하는 친척 유심 180

귀신 불러내는 정백창과 고양이 원령이 씐 소용 조씨 185

반정동지에서 정적으로, 심기원 대 김자점 193

음덕으로 국구가 된 민유중 197

홍수의 변을 일으킨 다혈질의 명성왕후 200

여종의 몸에 씐 인평대군 부인의 혼령 206

무인의 몸에 씌인 김석주의 혼령 210

신념을 지키다 굶어 죽은 이언세 215

간을 적출당한 과부 아들의 저주 217

홍계희 가문의 비화 222

왕의 사위로 환생한 역관의 아들 224

김상용의 후손들 226

자식농사 망친 고관대작들 228

술 석 잔에 묶인 신하들 232

복불복 왕의 장인들 238

켕기면 옮기는 왕들의 거처 248

요절한 왕세자와 열등감 쩌는 왕들 254

조선시대 여성의 이름이란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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