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보다 안락을 선택한 한국사회

미래를 포기한 기성세대

by 누리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은 가난도, 외부 위협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충분한 부를 축적한 세대가 그 부를 오직 자기 보존에만 사용하는 데에 있다. 이 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분명히 역사적 공로를 남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공로가 안락을 선택하는 면책특권으로 전환되었다는 데 있다. 한국의 기성세대는 이제 더 이상 사회를 전진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안락을 선택하며 청년들의 미래까지 부의 축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1. 부를 책임이 아닌 자본축적의 도구로 만든 세대

서구 르네상스시대에 귀족들은 그들의 부를 미지의 문명 건설에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투자했다. 서구의 귀족들은 그들의 부를 젊은 과학자와 무명의 예술가를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가 과학과 수학을 하였고 돈을 주고 사서라도 그들의 이름을 과학과 수학분야에 남겼다.


반면 한국의 기성세대에게 부는 자본 축적의 도구일 뿐이다. 부동산, 연금, 주식투자, 안정된 직업, 자녀의 의대 진학은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한다. 오늘날 서학개미들은 무역을 통해서 벌어들였던 부 만큼 자본 투자를 통해서 벌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지만 이들 돈은 미래의 새로운 문명건설에 사용되지 않고 자신들의 안위에 더 높은 성벽을 짓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현시대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온다. 이 시대는 물질주의를 넘어서서 정신주의로 진입하는 단계이고 기존의 모든 사상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사상이 탄생하는 시점이다. 불확실성 시대에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하지만 불확실성 시대는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지금 환웅 시대의 정신문명을 부활시키는 웅장한 문명의 전환점에 서있다. 그런 만큼 엄청난 위기와 실패가 우리 앞에 있고 또한 황백전환을 가져와서 서양이 아닌 우리가 새로운 정신문명 건설을 주도하게 되는 엄청난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 세대는 시장의 위험은 부를 축적하는 기회로 찬미하지만, 과학의 위험은 혐오한다. 청년들에게 “도전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작 자신의 자산과 자녀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그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과학은 국가의 몫이고, 실패는 젊은이의 책임이며, 자신들의 자녀들은 안정된 직업인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자신들은 그 결과만 소비하면 된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2. 과학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과학자를 불안정 노동자로 만든 모순

기성세대는 과학의 중요성을 말하는 데 인색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제도 속에서 과학자는 항상 임시직이다. 연구비는 쪼개지고, 성과는 단기 지표로 재단되며, 실패는 곧 탈락을 의미한다. 이 구조를 설계한 이들은 모두 “안정된 자리”에 있다. 자신들은 연공과 연금으로 보호받으면서, 젊은 과학자에게만 무한 경쟁과 무한 불안을 강요한다.


대부분의 한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과학과 예술분야보다는 돈 잘 벌고 안정적인 직장을 보장하는 의대에 진학하라는”는 협박성 조언이 나온다. 이 얼마나 기괴한 풍경인가. 과학의 중요성을 가장 크게 외치는 세대가, 과학자가 되는 길을 가장 먼저 차단한다.


3. 의대 쏠림은 젊은 세대의 탐욕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공포다

현시대의 의대 쏠림 현상을 젊은 세대의 계산적 선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비겁하다. 그것은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밥그릇 철학의 결과다. 이 사회에서 의대는 단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기득권의 테두리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확실한 통행증.”


기초과학, 공학, 철학, 순수 학문이 모두 불확실한 도박으로 인식되는 대한민국의 사회에서, 자녀에게 의대를 권하지 않는 부모는 오히려 이상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불안을 자녀에게 전가했고, 그 불안이 사회 전체의 지적 다양성을 질식시켰다. 우리는 인문학과 기초과학을 파괴하면서 미래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들이 한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층이라고 생각되면 자신들 마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행동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와 미래의 인류를 위해 고민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민중들이 일어나서 나라를 구했던 일은 더 이상 미화되서는 안된다.


4. 조선 말기 선비와 닮아가는 오늘날의 엘리트

조선 말기의 선비들은 체제 붕괴 직전까지도 예법과 명분을 붙들었다. 변화는 위험하다 했고, 체제에 대한 질문은 불온하다 했으며, 기존 질서의 균열은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오늘날의 한국 엘리트 기성세대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개혁을 말하지만, 자신의 자산과 지위가 흔들리지 않는 범위에서만 개혁을 허용한다.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수십 년 동안 바뀌지 않는 수능이라는 대학입시제도이다. 이것은 기득권들의 안일함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이다. 한국의 사회는 수능이라는 제도로 모든 학생들을 수능점수로 줄 세워서 얄팍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제도 안에서 새로운 문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돼지가 학문을 하는 것 보다도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보수도, 진보도 아니다. 이것은 안락의 이데올로기다. 그리고 안락은 언제나 문명을 쇠퇴시켜 왔다.


5. 부유한 세대가 질문을 포기할 때, 사회는 늙는다

과학은 젊은이의 용기로만 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성세대의 후원과 관용이 있을 때 비로소 뿌리내린다. 실패한 연구를 “세금 낭비”라 조롱하고, 긴 시간을 요구하는 학문을 “비효율”이라 낙인찍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 사고 능력을 포기한다.

오늘의 한국 기성세대는
“우리는 무엇을 역사에 남길 것인가?”를 고민하는 대신 이렇게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자본을 축적하고 지금의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

이 질문의 전환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다.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은 자신의 시대를 넘어서 미지의 새로운 문명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기성세대는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연장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


만약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한국은 또다시 서구가 만들어 놓은 문명을 소비하는 나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먼 훗날 역사에 "한국은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철저히 학습하여 부유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기득권엘리트들이 자본 축적에만 몰두하다가 새로운 문명건설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잊히게 되었다."라고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기괴하고 병든 사회를 만든 책임은 젊은 세대가 아니라, 이미 선택권과 자원을 쥐고도 안락을 선택한 기성세대에게 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기로에 서 있다. 조선 말기의 선비들처럼 기득권을 위한 체제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서구 르네상스 시대의 귀족들처럼 미지에 대한 탐구에 그들의 부를 사용할 것인가.


새로운 정신문명은 과학을 통해 건설된다. 우리가 과학을 통해 정신과 마음작용을 규명하지 못한다면 다가올 AI 문명은 허상에 불과하다. 우리의 시도에는 수많은 실패가 따르겠지만 우리는 반드시 해낼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의 뉴튼이 탄생해서 새로운 정신문명 건설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과학은 가난해서 꽃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도전하지 않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오늘의 한국이 과거 조선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부의 크기가 아니라 부를 사용하는 상상력부터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또다시 서구의 이론을 수입하며, “왜 우리는 안 되는가”를 질문하는 데서 역사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과거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의 뉴튼이 모든 물질의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의 기초를 만들어서 현재와 같은 첨단의 물질문명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지금 모든 정신의 마음작용을 설명하는 과학으로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 새로운 정신문명을 일으켜야 하는 시점에 있다.


지속가능한 정신문명은 무한에너지와 무한한 기술의 발전에서 오지 않는다. 지구는 최상위 수천억 달러를 가진 자산가들를 위한 놀이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모든 인류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천


#한국사회 #세대문제 #도전 #과학 #의대쏠림 #미래 #문명비판

keyword
작가의 이전글AI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