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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현 Dec 15. 2024

국가 보상 아래 펼쳐진 갈등

올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국내 4대 그룹 홍보팀 간부들과 여의도서 점심미팅을 가진 후 지하철역으로 걸어 나오던 중 재개발 이슈로 뜨거운 한 아파트 단지를 지나갔다.


해당 단지엔 국내 유명 건설사가 붙인 현수막과 피켓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고 한 아파트 주민은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유심히 현수막에 적힌 문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재개발이 이뤄질 것 같단 내 말에 기업 홍보팀 간부는 ‘여긴 땅값 되게 비싸요. 기존 주민들 보상안 마련하는데 꽤 많은 돈이 들어갈 거에요 아마’라며 억 단위 금액이 필요할 것이라 조언했다. 수천억 원이 들어갈 수 있단 말도 꺼냈다.


앞서 말한 여의도 모 단지뿐 아니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한 개발 사업으로 일대 전체 건물이 철거될 운명에 놓인 단지는 국내에 수도 없이 많다.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국가 개발 사업이란 명분 아래 살던 곳을 떠나 보상금을 받고 다른 곳에 터전을 잡아야 한다.


기존에 내가 살고 있던 곳에서 유지하던 생활과 방식, 주변 이웃과 인적 교류, 직장 통근 방식을 고치고 기존엔 없던 이사 계획과 이사갈 곳에서 살아갈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삶 전반에 있어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그나마 여기까진 자의적으로 매꿀 수 있는 범위에 속한다. 문제는 돈 적인 면에서 발생한다.


기존에 내가 살고 있던 곳에서 벗어나 사는 불편함과 ‘버려야 하는 기회비용’이 국가가 보상으로 제시한 금액보다 적다 느껴지면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은 물론 법적 테두리서 허용하지 않는 ‘불법을 감수한 항의성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일부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가 2008년 2월 10일 우리나라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소실된 사건이다. 우리에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교수도 당시 화재로 인해 문화재청장 직을 사임했다.


숭례문에 화재를 낸 범인 채모 씨는 범행 전 택시를 타고 숭례문 일대에 내린 후 2층으로 올라가 불을 냈다. 이후 아무렇지 않게 인천 강화로 갔던 채모 씨는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수사를 이어가던 경찰에 붙잡혔다.


불이 모두 꺼진 후 숭례문서 현장 검증을 받던 채모 씨는 대통령에게 몇 차례고 하소연했지만 묵살당했다며 당시 대통령이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름을 언급하며 ‘노무현 잘못이 99.9%고 내 잘못은 0.1%다. 그래도 인명 피해는 없었잖냐. 문화재는 복원하면 된다’는 망언을 퍼부었다.


채모 씨가 대통령을 언급하며 책임을 돌린 데엔 국가 배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채모 씨는 철학관을 운영하던 남성으로 택지개발에 따른 토지 보상액을 두고 건설사와 이견을 보였다. 건설사는 땅과 건물값 감정 평가를 토대로 9680만 원을 제시했지만 채모 씨는 4~5억 원에 달한 돈을 주장했다.


해당 사안은 법적 공방전까지 이어졌지만 채모 씨는 패소했고 1억 5000만 원에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채모 씨는 합의를 뒤집고 항의를 이어갔고 건물은 강제 철거됐다.


국가가 자신의 편을 들지 않았단 판단 아래 앙심을 품은 채모 씨는 국가에 대한 보복으로 국보 1호 숭례문 방화를 저질렀고 범행 이튿날 숭례문은 하단 돌기둥 윗부분의 대부분이 소실됐다. 2층 누각 90%와 1층 누간 10%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소실됐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이후 각계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2008년 2월부터 2013년 5월까지 5년 5개월간 복원 공사를 진행한 끝에 숭례문은 복원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때 그 사건의 여파로 숭례문은 특별한 개방 행사를 하지 않는 한 2층 누각을 일반인에 개방하지 않는다.


숭례문 화재 사건은 국가 보상안에 대한 특정인 한 사람의 불만과 앙심에 따른 것이었지만 이보다 많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단체로 목숨을 건 저항을 이어간 사건도 있었다. 오늘날 재개발·철거민 이주 문제 발생 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용산참사’다.


용산참사의 정확한 명칭은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이다. 건물 일대 재개발로 인해 기존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게 된 세입자들 중 일부가 2009년 1월 20일 용산 한강로2가 남일당 건물 옥상서 점거농성을 벌였다. 전국철거민연합회 회원도 옥상 농성에 참여했다.


검찰 공소사실에 따르면 철거민들은 옥상 건물 위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했다.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맞섰다.


경찰은 옥상서 점거 농성을 벌인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크레인으로 끌어올렸고 이때 건물 3·5층서 화재가 발생했다. 옥상 망루에도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번졌고 밑에서 애타게 상황을 지켜보던 철거민 가족들은 ‘사람 다 죽는다’며 오열했다.


오전 8시 경찰특공대는 건물서 체포한 철거민들을 강제 연행했다.


당시 한 철거민은 취재를 위해 현장을 방문한 기자단에 ‘5명만 살아남았어요’라며 건물 내부서 사망한 사람이 있음을 암시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재개발 국가 보상 문제로 촉발된 용산참사는 철거민 5명·경찰 1명 사망이란 ‘참혹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


용산참사가 벌어진 2009년 당시 나는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지만 방영된 관련 뉴스를 지금도 기억한다. 재개발 보상 문제로 촉발된 국가와 민간인 간 분쟁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단 충격 때문이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모두를 100% 완벽히 만족시킬 수 있는 합의안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인과 세력 간 양보·타협으로 합의점을 도출한 뒤 최종 조율 단계를 거쳐 마련된 안이 합의안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숭례문 방화 사건이나 용산참사는 국가에 비해 세력이나 영향력이 월등히 약한 민간인이 법의 테두리서 벗어난 행위를 저지름으로써 극단적 갈등이 표출된 사례다. 갈등 표출로 행위를 저지른 이들뿐만 아니라 제3자 국민에게도 직간접적 피해가 간 사례기도 하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올바르단 건 아니다. 숭례문 방화사건 용의자 채모 씨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들이 자신의 일상과 목숨을 바꾸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 데엔 이들의 목소리를 세심하게 듣고 조율하지 못한 국가 책임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간인은 언제까지나 국가를 상대로 하면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 을(乙)이 돼 자신이 원하고 주장하는 만큼의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럴수록 국가는 민간인의 의견을 더 세심하게 듣고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국가의 행위에 불만을 품은 민간인이 저지를 행위를 의식해서라도 더더욱 세심히 귀기울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다가올 2025년 대한민국엔 제2의 숭례문 화재나 용산참사가 벌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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