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5개, 5점 만점에 5점인 이유 [결말 스포주의]
오늘 우연히 넷플릭스 영화 "굿뉴스"를 보게 되었다. 첫 장면을 보자마자, 소름이 끼쳤다. 요즘 내가 소설을 쓰고 있었는데, 그 소설과 첫 구성, 첫 대사가 정확하게 일치했다. 사람들이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마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수준이, 어느 높은 수준의 임계점에 다 달았다고 생각한다.
1. 실화를 바탕으로 영감을 얻음
2. 하지만 모든 구성과 인물은 상상 속 허구의 인물임
3.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확히 이 세 가지 단락이, 내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지구에 사는 인류는 달의 뒷면을 절대 자연적으로 볼 수 없다. 모든 진실은 달의 뒷면에 존재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달의 앞면이 거짓은 아니다. 앞면이든 뒷면이든 달은 여전히 달이다.
아마도 3번째 저 문구는 생떽쥐베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따왔으리라 짐작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서고명의 운명이 정확하게도 내 소설 주인공과 정확하게 일치했고, 구성력도 상당히 비슷했다. 굿뉴스의 감독 변성현 님은 이분법적인 문제, 세상의 모든 모순이 가진 양면성을 정확하고 천재적으로 구성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모든 이분법적인 문제들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고, 그 양면성은 모순을 만들어낸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존재하게 된다. 영화 굿뉴스에는 배드뉴스도 함께 존재한다. 하지만 굿뉴스도 배드 뉴스도 모두 진실이라는 게 명확한 초점이다. 어떤 뉴스가 본인에게 굿뉴스고, 배드뉴스인지는 인물에 따라 상황에 따라 지속적으로 역설을 가지고 전개된다. 하지만 이것은 우연으로 시작된 어떤 사건의 의한 일로 생각되지만, 사실 모든 시간에 흐름에 따라 모두를 살리는 필연적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연과 필연. 이것 또한 모순이다. 하지만 모든 모순은 서로의 존재함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빛이 있어야 어둠을 설명할 수 있고, 어둠이 있어야 빛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빛만 있어서는 빛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빛은 빛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도 그렇다. 선이 존재해야 악도 설명할 수 있고, 악이 있어야 선의 존재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이 선이었고 악이었다고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까. 그저 각자의 놓인 상황에 따라 하나의 사건은 선으로도 악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주인공 서고명의 운명이 정확히 그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관제탐에서의 어쩔 수 없이 거부할 수 없는 임무를 맡게 되고 납치된 모두의 목숨을 살리는 영웅, 즉 훈장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회로를 돌려 자신의 일이 선이라 굳게 믿고 실행한다. 하지만 이내 상황에 따라 자신의 판단이 결국 모든 납치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는 살인자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엔 훈장을 받는 영웅이 되고 싶었지만, 나중엔 모두를 죽이는 살인자의 면모만은 회피하길 원하게 된다. 한 가지 상황에 극한적인 양극화의 입장을 오고 간다. 자신의 의도는 억지로 맡게 된 하나의 사건에서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 있는 혼란적인 상황에 따라 변했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주인공의 굳건한 신념. 모두를 살려야 한다는 것만은 변함이 없었다. 진실은 서고명은 모두를 살리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끝내 결말은 영웅도, 살인자도 아닌, 모든 상황을 겪고, 모두를 살리고도 자신의 목숨을 간신히 부지한 그저 아무 일도 겪지 않는 처음으로 돌아간 위치 그 자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는 비밀을 하나 간직한 채 말이다. 이것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된다. 영화 속에서 서고명은 모두를 살리려 고군분투했지만 결국 모두를 살린 자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채로 허탈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가 모두를 살린 것이 없었던 일이 될까? 모두를 살린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지언정, 아무개(설경구 님)만이 그 사실을 인정해 주고 그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선택을 한다. 마지막 장면도 나에게는 참 많은 모순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결국 아무개가 서고명으로 살아가면서, 서고명은 무사히 살아간 것이 맞았을까? 혹시 독재정권의 이름하에 서고명이 이름도 없이 처리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열린 결말로 끝이 난다. 영화 속에 내일의 죠가 정말 불타 죽은 것인지, 서고명의 말대로 작가가 그저 색칠을 하지 않아 죽은 것처럼 보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그 결말을 해석하는 것은 관객의 몫인 것이다.
영화에서 서고명이 영웅은 아니지만, 평범하게 살아갔을지, 독재정권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영화 흐름상 서고명을 죽이진 않았을 것이다. 독재정권이지만 민주주의를 외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역시 모순점이다. 이름을 가진 그리고 그 이름을 높이 떨치라는 뜻의 서고명과 이름이 없는 아무개 또한 모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 역시 모순, 이 영화는 그야 말대로 세상의 모든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모순에 대한 나의 해석은 그렇다. 이분법적인 모순의 법칙에도 중간, 중도는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선은 악을 전재로 피어난다. 모든 악은 선을 전재로 피어난다. 세상엔 100% 선도 100%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은 그 모순 덩어리 세상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삶에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선과 악이 모두 자리 잡고 있지만, 서고명처럼 모두를 살리는 이타적인 선의 진리가 더 높은 사람이 있는 반면, 이기적인 독재자처럼 자신의 숙취가 더 중요한 이기적인 악의 진리에 좀 더 가까운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독재자 또한 사람들을 살리는 편에 손을 들었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변할 수 있다. 그래서 윤리는 어려운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을 겪으면서도 항상 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자율주행 자동차를 연구하는 개발자들은 윤리의 모순을 겪는다고 한다. 자율주행하던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고장 나 막다른 골목길 앞에 핸들을 꺾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좌측으로 핸들을 꺾으면 6명의 사람이 죽는다. 반대로 우측으로 핸들을 꺾으면 한 명이 죽는다. 그리고 그대로 돌진하게 되면 운전자가 벽에 부딪혀 죽는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어디로 핸들을 꺾는 것이 윤리적일까. 다들 6명을 살리는 것이 한 명의 소수가 희생하는 것이 윤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1명이 나의 어머니라면? 나의 자식이라면? 핸들을 과연 그 한 명 쪽으로 꺾을 수 있을까? 그 질문에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벽에 부딪혀 내가 죽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율주행 자동차 아니었나. 자동차는 에어백을 터트려 혹은 에어백으로 사람을 감싸 자동차 안에 사람을 밖으로 무사히 구출 후 자동차만 벽에 부딪힌다면? 인간은 모두 살 수 있다. 그리고 자동차는 물질, 그야말로 기계이다. 파괴되어도 인간이 다시 고칠 수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도 한 명의 희생자도 용납할 수 없다는 윤리를 보여준다. 납치범 또한 악이 아니었음을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저 사상과 이념 사이에 갈등을 겪은 순수한 청년들이었을 뿐이었다. 이 영화에 절대적인 악은 아무도 없다. 그저 서고명의 희생만 존재했다. 하지만 서고명은 정말로 자신을 희생해서 많은 일들을 겪고 겨우 목숨만 부지한 이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본 영화 밖 현실의 관객들이 서고명이 진정한 영웅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서고명의 존재로 영화의 서사가 이루어지고, 영화는 비로소 따뜻한 결말을 갖는다. 서고명은 진정한 영웅, 영화 속에서 누가 뭐래도 단연코 주인공이다.
이처럼 세상은 많은 모순들 사이에 직면한 블랙코미디이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 영화 같은 일들이 빈번하게 생긴다. 그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과연 어떤 마인드로 살아가야 할까. 굿뉴스인지 배드뉴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살아가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어떠한 확고한 신념도 환경에 따라 위협받을 수 있다. 우리는 유연해야 한다. 더 선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눈을 크게 뜨고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 늘 자신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또한 틀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느 상황에서도 선에 가까운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보이지 않는 진실들과 마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00% 선 100% 악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스스로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지 늘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성선설, 성악설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선과 악의 면모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면서 어떤 쪽에 설지 스스로 선택하기에 달려있다.
나의 삶에, 당신의 삶에,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미래에 대해
늘 선이 가까운 쪽으로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