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엄마(완두콩스프)

지구별 스프

by Gourmet

"지구 한 알, 지구 두 알, 지구 세 알..."

어린시절의 나에게 자그마한 완두콩들은 곧 지구별이었다.

서울의 한구석 빌라에서 살 때 엄마와 초등학교 1학년인 나, 다섯 살 동생 이렇게 세 명이 둘러앉아 완두콩을 스테인리스 대야에 가득 담아놓고서 고사리손으로 꼬물꼬물 껍질을 까던 기억이 생생하다. 엄마는 특히 입맛이 까다로웠던 동생이 채소를 먹을 수 있도록 궁리를 많이 하셨다. 당근과 양파 조각을 넣은 감자크로켓, 생토마토 스파게티, 그리고 오늘의 메뉴 완두콩 수프. 다 깐 완두콩을 깨끗한 물에 씻은 다음 약간의 감자와 양파와 함께 버터 한 조각에 볶아 믹서에 넣고 간다. 그 후 생크림을 붓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하면 완성되는 간단한 음식이다.

여기서 실토한다. 동생이 입맛이 까다롭다고 했지만, 완두콩은 나도 싫어했다. 정확히는 완두콩이 들어간 밥이 싫었다. 하얀 쌀밥에 눈치 없이 번지는 연두색이 식욕을 감퇴시켰고 익으면서 속은 파실파실 흩어지는데 속껍질은 분리되어 이빨에 끼는 게 질색이었다. 게다가 단맛은 나는데 설탕의 단맛과는 다르면서 느껴지는 조용히 ‘나는 초록색이야!’를 외치는 그 맛이 소름 끼쳤다. 그렇지만 엄마와 동생과 함께 만든 완두콩 수프는(물론 뒤의 과정은 모두 엄마가 요리했다.) 완두콩의 옅은 단맛과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생크림이 무척 잘 어울려 맛있었다. 게다가 위에 앙증맞게 올라간 귀여운 빵조각이 내는 바삭한 식감이 좋았다. 이렇게 음식을 만들어 먹고 지방에서 일하고 있던 아빠에게 스카이프로 화상통화를 걸어 오늘은 이런 음식을 만들었다고 조잘조잘 자랑했던 것이 소중한 추억이었다.

당시 뷔페나 호텔 조식에서나 볼 수 있었던 완두콩 수프는 어디에서 온 레시피이냐. 우리 엄마랑 아빠는 신혼여행 대신 코알라와 캥거루의 나라 아니 미트파이와 파블로바의 나라 호주로 가는 비행기를 택했다. 엄마는 홈스테이 집주인으로 아빠는 택시 기사로 일하며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다른 집 아이들을 돌보며 스물여섯 살이었던 엄마의 유일한 취미는 영어로 된 요리책을 읽는 것이었다. 결혼하기 전에 요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엄마였는데 이때 요리 실력을 키워 지금까지 써먹고 있다고 하셨다. 5년 뒤 한국에 돌아온 엄마는 그때 만들었던 요리들을 채소의 껍질을 함께 깔 수 있을 만큼 자란 우리와 함께 만들었다.

영어영문학과를 전공하셨던 엄마는 우리에게 늘 영어로 된 비디오를 틀어주곤 하셨다. 가장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은 로렌차일드 원작의 <찰리와 롤라> 시리즈이다. 나이 차이는 뒤바뀌었지만, 주인공들이 우리집과 같은 남매라는 점에서 더욱 재미있게 본 만화였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만화이니 아마 나 말고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난 토마토 절대 안 먹어’라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편식하는 여동생을 위해 오빠가 채소 요리들을 기발한 상상을 통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용이었다. 그러한 상상 중에는 당근은 목성에서 뽑은 외계 작물이다, 으깬 감자는 산에 걸려있는 구름을 떠온 거다, 생선커틀릿은 인어꼬리였다던가 하는 것들이 있었다. 동글동글 완두콩은 그 모양새를 닮은 빗방울로 표현되었다. 주인공 찰리와 롤라가 우산을 뒤집어 열심히 완두콩을 채집하는 모습은 나도 텔레비전으로 들어가 완두콩 비를 맞고 싶을 만큼 즐거워보였다.

찰리리 롤라는 완두콩을 빗방울이라고 봤지만, 나는 완두콩이 지구별 같다고 생각했다. 당시 피아노 학원에서 배웠던 ‘어린왕자에게’라는 동요를 배웠던 가사에 ‘만날 수는 없지만 내 맘속에 사는 친구야~ 지구별에 다시 와주렴~ 사랑하는 나를 찾아서~’라는 구절을 매일 흥얼거릴 때였다. 또 친한 언니들의 집에 놀라 가면 하나씩은 있었던 플라스틱 지구본의 영향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떠하든 잠잘 때 양을 세는 것처럼 나는 완두콩을 지구별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둘 세었다. 걸리버 여행기에 빠져있었던 나는 완두콩에는 어떤 소인국 사람들이 살고 있을지 떠올려보는 것도 흥미로운 놀이였다.

그 당시야 단지 초록색의 반질반질한 구슬의 모양새가 지구별과 닮아 그렇게 생각했지만,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와 가까운 지금 와서 보면 지구별수프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두콩 스프는 고기파이 위에 수프를 올려먹는 전통 음식인 호주의 ‘파이플로터’의 기본이 되는 수프다. 또한 캠펠수프로 편리하게 먹을 수 있는 통조림으로도 출시되어 있다. 호주에서 엄마는 젊은 나이에 여러 아이들을 돌보며, 아빠는 4일은 택시를 몰고 나머지 3일은 비자를 위해 학교에 다녔다. 한국에 와서도 엄마는 우리 둘을 키우고 아빠는 지방에서 일하며 주말부부로 사셨다. 대부분이 함께라 즐거웠지만 이따금 힘이 부쳤을 때 흘렸을 완두콩을 닮은 커다란 눈물이 완두콩 스프에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에서 먹는 완두콩 수프는 동양과 서양을 잇는 그야말로 완벽한 “지구별수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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