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이모가 다섯 명, 외삼촌이 한 명 계셨다. 늘 시끄럽고 웃음이 많은 이모들 사이에서 내성적이고, 우수에 찬, 눈썹이 짙고 잘생기고 키가 훤칠했던 외삼촌은 경기고등학교-서울상대를 졸업한 소위 엘리트이자, 역시 그 시절, 이화여전을 나온 지적인 외할머니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이자, 술과 예술을 사랑하여 가정에는 사못 소홀하였던 외할아버지 덕에 흔들리는 집안의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인생의 절반은 타지에서 보내시는 지라, 외삼촌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어쩌다 외삼촌이 한국에 와서 가족모임에 '등장'이라도 할 라치면, 그 소란스럽고, 시끄럽던 엄마와 이모들이 얼마나 외삼촌에게 깍듯했던지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엄마는 외삼촌이 돌아가시던 순간까지 반말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 당시 외삼촌의 존재감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우리 엄마는 7남매의 여섯째였고, 당시에 자식을 6명 7명 낳는 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세째인 외삼촌을 중심으로한 엄마와 이모들의 결속력은 정말 대단했다. 나중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이모들이 하나 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일주일에 두 세번은 돌아가며 이모네집을 놀러갔었고, 심지어 두 명의 이모들과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의 유년시절은 외롭지 않았다. 워낙에 사교성이 좋아 골목대장감의 리더쉽에 여자보다는 남자친구가 더 많았던 말괄량이 어린시절, 나에게 친구가 없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천성적으로 예민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성격이었던 내가 늘 시끌벅적한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것도 그 많았던 이모와 사촌들 덕분이었다.
엄마아빠놀이, 오락실놀이, 병원놀이 ,종이인형놀이 남녀 성비가 균형적이었던 우리 이종사촌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의 구분같은 것도 없이 정말 즐겁게 놀았고, 엄마와 이모들은 수다를 떨거나, 같이 맛있는 것을 해먹거나, 고스톱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있는 막내이모와 영국에 계신 외삼촌을 제외해도 우리 사촌들의 수는 11명이나 되었으니, 방이 가득찼음은 물론이고, 나이도 제각각에, 성격도 다 달랐으니, 싸운다거나, 소란스러웠을법도 한데 우리는 참 우애가 좋았다.
그래서 학교에 다녀와 내가 가장 듣기 좋아했던 말은
오늘 저녁 이모네집에 간다
그리고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은, 나를 포함해 누군가의 생일을 빌미로 다들 모일 때였다. 누구에게나 생일이 기다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테고, 왜 생일이 좋은지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테지만 어린 내가 생일을 기다리는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촛불 점화식이 끝나고 예쁘게 케이크를 잘라 은박지를 덮은 접시에 무심하게 쓰러뜨린 '버터크림케이크'를 잔뜩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버터크림이라니. 말그대로, 손가락으로 눌러 쑥 들어갈정도의 말랑한 버터에 설탕이나 분당을 잔뜩 넣어 만든 크림이라 달달하고 느끼함의 극치인데다 잘 못먹으면 목이 멕히고, 도무지 건강에는 전혀 좋을 것 같지 않은 그 싸구려 버터크림을 열 손가락에 묻히며 먹었던 어린시절이 참 이해가 가지 않지만, 내 기억엔, 그나마 케이크 안쪽의 빵 먹는 것도 아까워 해골처럼 빵은 보기좋게 남긴채, 크림만 싹 발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누군가 남긴 케이크의 크림도 모두 내차지 였다. 버터크림이든, 초코크림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모닝빵을 갈라 가운데 10그램짜리 가염버터하나를 야무지게 넣고, 맛있게 즐길 정도로 버터를 좋아하지만, 그 당시의 버터는 지금처럼 질좋은 버터였을리도 없지 않은가.
지금도, 앨범을 넘기면, 이층짜리 딸기젤리가 올려진 버터크림케이크 앞에서 코에 크림을 묻히거나 손가락에 잔뜩 크림이 묻은 채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있는 내 사진이 참 많기도하다.
나는 7년전, 동경제과학교 출신이자, 내가 기억하는 가장 세련되고, 유니크한 서양 양과자점의 전신인 '파티스리 에구치'출신이시자 유명한 인기몰이를했던 스위츠플래닛의 전진욱 스승님께 3개월동안 베이킹을 열심히 배웠다. 백조모양의 슈부터, 크림치즈가 들어간 롤케이크를 비롯, 최고급 발로나 초콜릿으로 만든 무스, 오페라 같은 정말 화려함의 극치인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고, 워낙에 디저트를 좋아하는지라 청담동이며, 홍대, 경리단길의 맛있다는 디저트는 거의 다 맛을 보았었다. 딸기가 샌드된 녹차 무스며, 쿠엥트로 향이 나는 크렘샹티의 케이크, 이탈리아 가정식 스타일이라는 티라미수, 섹스앤더시티에서 사라제시카파커가 맛있게 먹던 매그놀리아의 컵케이크,카라멜 위에 솔트플레이크가 살짝 얹어진 최고급 초콜릿 무스까지.... 버터크림에 환장을 하던 입맛이 이런 세련되고 고급진 맛에 길들여 졌으니, 버터크림케이크 같은 건. 그냥 사진첩에나 등장하는 추억정도 밖에는 되지 않았을까.
올해 나는 불혹의 나이가 되었고,꽤나 다이내믹하고, 활기찬 한 해를 보냈지만, 마음 한 구석은 늘 허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9개월동안 스타트업 회사의 레시피 개발자이자 스타일리스트로 고군분투하며,살림과 요리를 똑부러지게 잘하는 아내이자, 사랑스럽고 예쁜 두 아이들의 엄마이자, 은행원 출신으로,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찾은 사람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사거나, 칭찬의 대상이 되어갈수록, 나의 이 허전함과 공허함은 더 깊어만 갔다.
생일 즈음해서, 평소 절친처럼 지내는 친구가 손수 생일케이크를 만들어 준다한다. 어떤케이크가 먹고싶냐는 말에 나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난.버터크림케이크가 먹고싶어.아주 촌스런 버터크림케이크.핑크색 장미꽃으로 장식하거나.초코크림으로 촌스럽게 글씨가 써져있거나. 딸기젤리가 올려진. 우리 어린 시절에 먹던 그런거"
3일을 꼬박걸려. 안에는 요새 핫하다는 폭신한 레드벨벳케이크가 들어있는 무식하게도 크고, 장미장식에, 초코크림으로 글씨까지 쓰여진 버터크림케이크를 마주했던 신촌의 어느 돼지갈비집. 나는 그 날 많이도 웃었고,많이도 취했고,많이도 행복했다.
막연한 꿈이라는 것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동안,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어있었고, 일적으로는 눈에 띄게 성장하는 그 시간동안, 가족에게도 소홀했고, 친구도 잊었다. 성취감과, 보람이라는 마약과도 같은 기쁨이 마음을 채워가는 듯하였지만, 따뜻함과 안정감을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던것이다.
어쩌면. 나는 버터크림케이크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아들래미 생일에 세련된 버터크림레드벨벳케이크를 사서, 1/3도 먹지 못해 버렸고, 친구가 생일에 만들어온 버터크림은 크림치즈가 반 이상이나 섞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니 말이다.(그 덕분에 아주 맛있게 끝까지 먹을 수 있었고)
어떤 부담이나, 미래에 대한 압박감같은 것 없이, 가족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앉아, 하릴없이 보내던 그 따뜻한 시간들. 어쩌면 그 시간들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그 시간들은, '버터크림'이라는 개체에 투영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우리가 음식을 맛있다고 기억하는 것은 단지 그 요리의 '맛'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그 시간의 온도, 그 공간의 냄새,함께한 사람들의 추억. 그 모든 것을 그 음식의 맛으로 기억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린시절.버터크림의 맛을 그렇게 기억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