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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지 Apr 07. 2016

클램차우더를 먹는다는 것

부슬부슬 비가 온다. 춥다고 하기에는 상쾌함 마저 느껴지는 일요일 아침 열시.

아침을 먹지않아 살짝 허기진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개연성도 없이 어쩌다 스치듯 그러나 강렬하게 꺼내어지는 기억들이 있다.

배가 고파서 였을까. 아니면 이 날씨 때문이었을까.


나는 2000년도의 보스턴, 8월이었지만 도시 군데 군데에서 느껴지던 아침 저녁의 서늘한 공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직도 한참 어렸던 이십대 시절 자신들이 스스로 다 컸다 생각하는 나와 제연이의 추억이 가득했던 미국동부여행.

15년이 지난 지금이지만 그때의 추억을 들여다보면 가슴이 저릿하다


대학원에 들어와 가장 처음 친해진 제연이는 나보다 두살이 어린 동생이었다. 살면서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지만 이 녀석만큼이나 무조건적으로 나를 따르고 좋아해준 친구가 있을까 싶다.


나는 언니가 참 좋아. 따뜻한 사람이라서

얼굴은 쎄씨에 모델로 나오는 아이들만큼이나 예쁘고 목표를 정해서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나는 나중에 꼭 언니같이 될거야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나 나를 좋아해줄 수가 있나 싶도록 나를 많이 따랐던 제연이는 남자친구에게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여고생처럼 늘 학교와 집을 같이 오갔고, 공부할때나 과외교습을 할때도 서로 기다려주는 것은 물론, 늘 전화를 하거나 심지어는 남자친구와 데이트할 때도 여러번 함께한 시간들이 많았으니 아마 그의 입장에서는 꽤나 성가시고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일수도 있겠다


2000년 봄 우리는 미국여행을 계획했다. 2주일동안은 우리 부모님이 계시는 서부에 나머지 3주일은 뉴욕과 보스턴을 포함한 동부로의 여행

무엇보다 짜릿했던 것은 이 여행이, 계획부터, 자금마련까지 그 모든 것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온전한 성인으로서의 독립적인 여행이란 점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도시 뉴욕의 카리스마 가득한 공기를 한껏 느끼고 우리는 또 꿈에 부풀어 하버드 소울에 취해보고자 보스턴으로 떠났다.


친한 사람과는 여행을 떠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보스턴 여행에서 그 말이 얼마나 참인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베드앤브렉퍼스트에서 돈을 아껴가며 여행을 다녔지만 한달 이상을 타지에서 보내려고 열심히 벌었던 과외며 아르바이트 따위로 벌었던 우리의 여행자금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연일 걷고 빡빡하게 채워야했던 여행에 우리는 심신이 많이 지쳐있었다. 마지막 점심거리를 사러 간 조그만 마트에서 베이컨 값을 두고 실랑이를 벌이던 우리의 갈등은 이내 큰 서운함으로 번졌고 늘 이런 일들이 그렇듯 감정의 간극은 겉잡을수 없이 커져 뉴욕으로 돌아갈무렵 우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채 따로 걷고 있었다


무리한 일정으로 종아리는 퉁퉁 부었고 주머니에는 꼬깃한 10불짜리 한장만이 있었으며 부실한 베드앤브렉퍼스트의 아침밖에 먹지 못한터라 너무나도 배가고픈 나는 허름해서 다 쓰러져가는 클램차우더 가게의 정겨운 싸인에 시선이 꽂히고 만다


클램차우더가 단돈 6불

들어가냐마냐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내 우리는 약속이나 한듯이 잽싸게 그 곳에 들어가 수프 한그릇을 함께 기다렸으니 말이다.


낡은 법랑을 가득채웠던 클램차우더. 단언컨대, 내 인생을 통틀어, 그렇게 따뜻하고 맛있었던 수프는 처음이었다


포슬포슬한 감자는 얼마나 오래, 또 빈번히,끓이고 또 끓였는지 많이 닳아서 감자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조개의 시원하고 짭조름한 맛이 베인 크림과 그렇게나 잘 어울릴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땀이 날정도로 맛나게 수프 한 그릇을 사이좋게 비운 제연이와 나에게는 멋적은 사과도, 미안하다는 한마디도 전혀 필요치 않았다.


가게를 나서는 순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듯 미소를 지으며 함께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나 우리에게, 큰 위로를 선사했던 한 그릇의 수프는 내게 all time favorite이었지만

언젠가 부터 나는 이 수프를 먹지 못했다.


그렇게도 소중했던 내 인생의 잊지못할 친구 강제연, 그녀는 2011년 이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는다지만, 시간이 지나도 더 선명하게 각인되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너무도 생생해, 가끔은 잊으려 애쓰는 우리들의 마음을 깊게 도려내기도 하고 훅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생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지 않으려한다. 함께한 시간들에 행복했고, 마음을 다했으므로....


비록 함께할 수 없다해도, 추억하며 행복해지려한다그리고 이런 날씨에 그녀가 보고싶어지면

나는 클램차우더를 끓인다.


2016년 4월, 에피톤의 sketch2를 들으며

그녀를 기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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