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작다고 시야가 좁은 건 아니다.
나는 눈이 작은 편이다. 예전부터 단추 구멍, 실눈 등의 별명이 늘 나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난 거울을 볼 때마다 의아했었다. 왜냐하면 내 눈은 그냥 뜨고 있을 때는 작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의 눈의 크기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있었다. 보통 미남 미녀의 기준으로 삼는 것 중 하나가 크고 맑은 눈인데, 나는 그것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창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던 청소년기, 그 시절 나의 눈은 내 수많은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내 기억엔 어느 명절 연휴 중 하루였던 것 같다. 명절을 맞아 TV에서는 명절 특집 코미디 프로가 방영되고 있었다. 안방 소파에 누워 그것을 보며 키득거리던 나는 어떤 장면을 보고 너무 웃긴 나머지 요즘 표현으로 '빵' 터진 적이 있었다. 그런데 계속해서 웃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이,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왜 앞이 안 보이는지 의아하기도 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현상에 대한 당황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리고 잠시 뒤,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고 나서야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웃을 때 소위 말하는 눈웃음을 짓게 되는 특징이 있는데, 너무 웃긴 나머지 심하게 웃다 보니 그 눈웃음이 지나쳐 자연스럽게 눈이 감겨버리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이 "너는 눈이 작은데, 앞이 잘 보이긴 하냐? (손을 내 머리 위에서 왔다 갔다 하며) 이거 보여?"라며 나를 놀린 적도 있었다. 요즘 컴퓨터 모니터나 TV를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는 시야각에 대한 고민이 과거 브라운관 시절 시야각 따윈 안중에 없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던 나는 선구자였던가. 과연 나의 눈은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내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눈이 어디까지 볼 수 있는가를 실험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아무리 실험해도 내 시야각이 넓은지 좁은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시야각이 어느 정도인지 나는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청소년기의 선구자적 고민의 결론은 '앞만 보이면 장땡'으로 끝을 맺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크기의 눈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다. 필자의 지인 중 한 명은 실제로 엄청나게 크고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니고 있어 나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고 있으며, 나보다 눈이 더 작아 귀여움이 철철 넘치는 사람 또한 주변에 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눈의 크기가 미적 기준에 의해 외적으로 어떻게 보이는지는 신경 쓰지만, 자신의 눈이 보는 양이 다른 사람들보다 적거나 많은지에 대해서는 고민하거나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앞, 옆, 그리고 주변의 사물들, 저 맑고 푸른 하늘 또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크기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역할인 '보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시야의 넓고 좁음의 차이는 분명 존재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보는 하늘, 땅, 산, 물의 모습이 다르지 않듯이 보이는 것의 본질은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필자는 앞으로 본인이 지닌 '작은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모습에 대해 '논(論)'이 아닌 '말(話)'을 하고자 한다. 세상의 이치나 사회적인 통념과 같은 어렵고 고차원적인 부분들은 '논(論)'의 영역이 필요하지만, 한 명의 인간(혹은 사람)으로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단상들을 나누고 소통하기에는 '말(話)'의 영역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필자가 몸담고 있는 청소년계의 이야기들을 많이 해보고 싶다. 청소년을 주제로 이야기를 끌어가다 보면 결국 만나는 것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리라.
단상이 모이면 철학이 되고, 철학이 모이면 세상이 바뀐다.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 또한 필자의 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단상들을 모으고, 그것을 철학으로 만들어 세상의 한줄기 빛이 되어주시기를 희망하며 브런치에서의 첫 글을 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