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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의청년학교 Nov 15. 2024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

길위의청년학교 5기 조자영

학창 시절, 뭐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공부를 해야 하나보다 생각하고 새벽부터 밤까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고등학교를 거치면 대학교를 당연히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가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 잘하는 노동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했구나 생각한다. 

어쨌든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성적에 맞춰 들어갔고 그럭저럭 다니는데 함께 있는 동기들도, 공부도 별로 재미가 없었다. 형편이 좋지 않은 핑계로 재미없는 학교를 1년만 다니고 휴학했고 곧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교차로를 뒤적이다 신문 지업사에 전화를 했고, 면접 후 곧바로 출근을 했다. 신문을 넣을 봉투작업과 신문배달 신청전화를 받는 등의 단순 업무였는데 보수도 괜찮았고 혼자 라디오 들으며 일하니 편했다. 사장님은 점심에 식사할 때 만나서 1-2시간 같이 있었다. 저녁에는 동네 햄버거 가게에서 일을 했다. 그곳도 거의 혼자서 손님 받고 주문 들어온 햄버거, 피자, 치킨 등을 만들었다. 사장님은 PC방에 계시다가 배달 있을 때만 오셨고, 마감 시간에 뒷정리를 함께 했다. 하루 15시간씩 일을 해도 피곤치 않았던 건 젊음도 있었지만 몸으로 열심히 일하고 끝나면 생각하지 않고 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 경험을 통해 사람을 대하는 기술과 일하는 감각과 실력을 키워나갔다. 


주일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주말이면 꼭 시골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어느 날, 한 아이가 갑자기 보육원에 보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상 눈에 밟히는 아이여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소식에 당황했고 한동안 많이 힘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복학 후 아동상담 수업을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시설에서 만난 청소년

     

대학을 졸업하기 전, 이력서를 냈는데 바로 일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첫 번째 직장은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이었다. 생활시설이다 보니 격일로 근무를 섰다. 초등학교 1, 2학년 아이들부터 20대 성인까지 있었다.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1년 이상 지냈던 아이도 있었고 일하는 동안에 들어왔다가 퇴소하는 아이도 있었다. 갓 대학 졸업한 20대 중반인 나는 갑자기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치료를 위해 산부인과를 데리고 갔고, 진단서를 받기 위해 의사와 상담하며 피해아이에게 원인제공을 한 것 아니냐는 투의 말을 내비친 의사에게 퍼붓고 싶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다독여야했다. 또 새벽까지 진술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토닥이며 아무 말 없이 지치고 속상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세자매가 함께 입소했던 일이 있었는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침에 밥 먹여서 학교 보내고, 주말이면 간식을 사주고, 혹시라도 가해자와 마주칠까 싶어 외출하지 못하여 답답해하는 아이들과 옥상에 올라가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오는 날에는 조용히 혼자 쉴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챙겨주기도 했고 가끔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때 나의 역할은 시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든든한 자기편나를 믿어주는 세상에 단 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길거리 캠페인을 할 때도 서슴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설명하며 성폭력근절 홍보지를 전할 수 있었다. 이젠 다 커서 성인이 되었을 그 아이들이 궁금하다.



성교육을 통해 만난 아이들

     

아주 잠깐 학교에서 성교육을 했던 경험이 직업으로 이어져 성교육강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강의기술이나 경험이 많지 않고, 청소년들의 특성을 모르던 시기였기에 그들의 특성을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에서 강의를 한다는 건 심히 어려운 일이라는 걸 배웠다. 특히 중학교 아이들을 만날 때면 늘 긴장을 해야 했다. 아이들의 엉뚱한 질문과 자유로운 태도, 말투는 강사라는 신분을 유지해야 하는 나를 매우 힘들게 했다. 교실 밖을 나서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이 시간만 잘 버티자는 마음을 가질까 했으나 그 아이들과 대충 만나고 싶지 않았기에 어떻게 해야 할까 매번 고민하고 가상의 상황을 생각했다. 무엇보다 기관의 대표로 나갔기 때문에 개인적인 감정으로 일을 처리한다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 때문에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아이들이 보는 성에 대한 관심, 이성친구, 성관계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업이 끝나고 별도로 찾아온 아이의 고민(여자친구와 관계했는데 임신했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도 들어주었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되었을 때 진지해지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고, 모두가 다 내 마음 같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내 기준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생각과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장난처럼 말하는 아이들도 다 자기를 들여다보면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고 다른 것에 신경 쓰며 잊으려고 할 뿐이었다. 그 시간 나에게 찾아온 그 학생에게는 내가 그 시간에 필요한 소중한 한 사람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네팔의 청소년청년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해외에 나가고 싶은 내 막연한 꿈이 어느 날 실현이 되었다. 선교사님의 네팔선교보고를 듣던 중 나도 네팔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요동쳤고 20대 마지막 해에 직장을 그만두고 네팔에 갔다. 한동안 사랑방이라는 곳에서 네팔 친구들과 함께 먹고 자며 살았는데 고등학생과 대학생들 10여 명이 있었다. 1층에는 여자숙소, 2층은 남자숙소였고 주말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예배드리고 식사를 하고 게임도 하고 놀았다. 여럿이 같이 사니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 공동체생활에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나를 손님으로 대하고 뭐든 자신들이 하려고 했던 그들을 보면서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10대 청소년들도, 20대 청년들도 모두가 나보다 더 훌륭한 어른이었다. 쓸데없이 고민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편하고 인상을 찌푸린 나였는데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유쾌한 사람이 되었고 그것이 좋아서 매일 그들 옆에 있으려고 했다. 그 중 한 친구가 나에게 네팔이름을 지어줬다. ‘차야’ 뜻은 그림자(shadow)이다. 내 한국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게 들려서 지어준 것인데 참 맘에 들었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누군가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로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이란 의미로 생각했다. 그들의 집안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형편에서 좀 더 나아지려면 취업을 하거나 해외로 나가서 돈을 버는 것이 유일했다. 네팔은 일자리가 없어 노는 청년들이 매우 많다. 열심히 공부하거나 뭔가 굳은 의지가 있는 아이들에게 선교사님은 한국으로 보내서 공부를 시키거나 일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난 함께 있었던 네팔 청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그들은 나에게 네팔어와 영어를 알려줬다. 한국어가 어렵기도 하지만 한국 사람과 한국음식을 접하면서 좀 친숙해졌고 정말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문장으로 말을 할 수 있는 실력까지 향상되기도 했다. 계획된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 같이 들어온 두 명의 네팔 청년이 있었는데 모두 다 열심히 공부하고 취직을 해서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잘 살고 있다. 그 중 한명이 나에게 네팔 이름을 지어준 친구이다. 그 친구는 현재 결혼을 했고 직장에 다니면서 잘 지내고 있다. 


모두학교를 통해 본 나     

지금 나는 복지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모두학교’라는 방과후학교인데, 복지관 직원들이 일하면서 우리 아이들을 우리가 잘 키워보자고 해서 모두학교를 만들었다. 10년 전에 만들어졌고, 자기주도성과 공동체성을 기를 수 있도록 몇 가지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10년 전에 10살이었던 아이는 현재 20살이 되었고, 성인이 된 아이는 모두학교에서 배운 자기주도성과 공동체성을 잘 적용하여 사람과의 관계를 매우 잘 하고 있다. 초등과정만 있었던 모두학교는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중등과정을 만들게 되었다. 교사들도 아이 나이만큼 성장하니 경험 없는 중등 아이들을 어떻게 대할지 매 순간이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직장맘으로 살기 위해 6개월 때부터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었다. 그때 내게 소중한 한 사람은 우리 아이를 나보다 더 잘 먹이고 입히고 재운 어린이집 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 덕분에 난 직장에서 맘 편히 일을 할 수 있었고, 먹일 걱정과 늦게 데리러 가는 불안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두 아이를 모두학교에 보내고 있다. 그곳에서 다른 형·누나·언니·오빠의 영향 아래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을 피해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대한다. 형제가 한 둘인 집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익힐 것들을 제대로 학습하지 않으니 많은 어려움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을 본다. 양보나 협력, 배려와 존중 등은 2-3명의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일어나기 힘든 영역이 되었다. 혹시 다툼이 일어난다면 2배, 3배의 경우의 수를 나열하며 아이들에게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굳이 자기의 것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있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배울 수 있는 공동체, 모두학교를 보내게 됐다.



모두학교 교사로 일한지 2년이 조금 못 되는 지금, 난 계속 성장하고 있다. 아이들을 공동체 안에서 키우는 일에 매진하기 위해 실무자로 있으니 이전에 수업이나 활동을 통해 아이들을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다르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25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매일 만난다. 내가 모두학교에 올라올 때 제일 먼저 했던 일은 매일 아이들에게 인사하는 것이었다. 하루에 단 1초를 보면서도 그것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재잘대며 복도를 쿵쾅거리며 뛰는 아이들에게 조용히 다니자고 어르고 달래고, 사춘기 아이들의 불만 섞인 말투에 속이 상하고,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병원에 데리고 가는 등 매일매일 몸과 맘이 바쁘다. 매일 혼을 쏙 빼놓는 일과를 보내고 나면 지쳐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클래식을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그 하루가 어렵고 괴롭지 않다. 어제 만난 아이와 오늘 만난 아이는 전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으로 아이들을 대하려고 한다. 그게 매일 아이들을 만나기 위한 내 마음가짐이다.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안에서만 활동하느라 답답하고 힘든 상황을 짜증과 다툼으로 보냈던 아이들이 올해는 밖으로 맘껏 나가 뛰어노니 얼굴색이 달라지고 말투가 변했다. 환경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아이들은 함께 지내면서 좀 더 성숙한 아이로 성장했다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에게 사회를 변화시켜서 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어떤 것이 좋은지어떤 것이 해로운 것인지를 분별하는 지혜를 알려주는 것은 더디지만 할 수 있기에 교사인 나는 매일 아이들에게 유익한 것을 선택하도록 안내한다. 다퉜을 때에도, 공부하기 싫을 때에도, 게임을 할 때에도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서 제일 좋은 것을 택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인 것을 아이들에게 말한다. 

난 행복한 교사로 살고 있다아이들은 매일 성장하고 있고 나 또한 매일 성장한다. 어디까지 성장할지 감히 가늠할 수 없지만 매일 즐겁게 사는 것을 잘 선택하는 매일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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