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사람들에게 배구라는 스포츠가 어떤 운동인지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보통은 '받고, 올리고, 때리는 스포츠다' 라고 말할 것 같다.
풀어보자면 상대방이 서브한 공을 받아서 우리 팀 세터에게 보내고, 세터는 그 공을 공격수에게 올려서, 공격수가 상대 팀 코트에 그 공을 심어버리는 스포츠다.
그래서 배구에서는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제일! 최고로!! 진짜로!! 중요한 것은 '나에게로 날아오는 공'을 '받아내는' 것이고 그게 모든 득점의 시작이 된다.
시합 볼 때에도 중계진이 한 경기 당 거짓말 안하고 한 20번은 넘게 말하는 문장도 '리시브가 모든 것이다'
그러다보니 배구를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점 중에 하나가 나에게 날아오는 공에 익숙해져야한다는 점인데.. 이게.. 말이 쉽지..
실제로 살면서 공이 나에게 날아오면 열에 아홉은 피할 것이다 왜냐면 그건 생존 본능이니까!!!!
심지어 공이 완만하게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어떤 특정 부위를 향해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몸의 어딘가로 굉장히 빠르게 날아온다.
이 때 나는 내게로 날아오는 공을 1번. 피하지 않고 / 2번. 그 지점을 예측해서 / 3번. 팔을 아주 곧게 펴서 받아내야 한다.
난 1번 단계에서만 몇 주 걸린 것 같다.
그냥 피하지 않는다. 라고 한 문장으로 쓰면 간단하지만 실상은... 사람이.. 공이 내 쪽으로 날아오잖아? 몸을 반사적으로 일으키게 된다. 본능적으로 도망갈라고 그러는건가? 여튼 배구는 자세를 낮추는 게 아주 정말 매니 진짜로 진심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이미 몸을 일으킨 시점에서 아웃.
나는 내 돈 내고 공도 맞고 점수도 잃고 팀원들의 신뢰도 잃고 코치님의 비난도 받고.
다행히도 어찌어찌 이제 피하지 않게 된다면 2번 3번까지는 어떻게든 뭐 해내게 되어있다. 물론 난 아직 못해냈다.
정말 리시브, 수비가 죽어라고 안 느는구나 하고 지난 주에도 배구 수업 듣던 중에 벽에 기대어서 거의 반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는데
같이 배우는 수강생분이 끝까지 버텨보세요 버티는 게 전부에요 라고 속삭여주셨다.
난 내가 분명히 자세를 낮춰서 공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걸까?
그 다음부터 걍 버틴다 몰라 그냥 버텨 하는 마음으로 응 나 이 공 받아 하면서 버텨봤는데..
조금씩....
공이 받아진다..????
10번에 4번 성공하던게 10번에 5번 정도로는 늘어나게 되었다.
무슨 차이가 있던걸까? 분명히 내 자세가 크게 달라진 건 없을 거 같고 그냥 내가 좀 더 공을 노려보고(?) 다리의 기강을 좀 더 잡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좀 힘이 풀려서 어김없이 수비에 실패한 다음에 알아챘다.
난 그냥 공이 날아오는 자리에 서있을 뿐 팔로 대충 막아버리자 라는 마음에 좀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누가 나를 억지로 배구학원에 집어넣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떤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스포츠를 배우는 것도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하지만, 다만. 적어도 공이 날아올 때 이걸 받아낼 사람은 지금 여기에 나밖에 없다. (당연하지 내가 배우고 있고 코치님이 나한테 공을 던진거니까)
그러면 그 다음은 단순하다. 집중해서 끝까지 공을 보고, 배운대로 팔을 쭉 펴서 받는다.
아무도 내 공을 대신 받아주지 않는다. 어설프게 얼버무리면 결국 공은 튀어나가게 되어있다. 임기응변이라는 게 통하질 않는 순간이다.
그 순간은 아주 정직하다. 내가 집중해서 해낼 수 있으면 성공하는거고, 연습이 부족했든 몸이 힘들어서든 한 끗이 부족하면 실점하게 된다.
나는 스스로가 꽤 임기응변에 능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약간 아는 게 부족해도 맥락이나 상황을 대략 추측해서 대응하는 경우도 많고, 빠르게 일을 쳐내야 하는 직무와 상황에서는 엄청난 강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다보면 결국에는 회피하거나 대충 넘어가지 않고 마주해야만 하는 지점들이 있다.
아무도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고, 내 문제는 내 문제이며 우수한 코치가 일백번을 말해줘도 내 몸은 나만이 움직일 수 있다.
그래도 꽤나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커리어에 대해서도 이제는 내가 문제를 끝까지 지켜보고,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느꼈다.
난 그냥 은퇴해버릴거야 하는 말로 꽤 오래 외면했고, 이렇게 하다가 대충 10년은 더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얼버무릴 수 있는 영역은 버무려왔었다. 뭐 이러다 사업을 하거나 코칭 같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해결방안을 찾은 척 옆으로 흘렸다.
어쩌면 커리어 스위칭에 성공한 누군가를 보고 내가 그대로 따라할 수 있진 않을 지, 이렇게 살다보면 누군가가 기적처럼 좋은 사업 아이템에 나를 슬쩍 탑승시켜줄 수도 있지 않을 지, 내가 차근차근 쌓아온 무언가가 나를 어딘가로 인도해주진 않을 지.
대충 공을 받고 어떨 땐 튕겨내면서 모른 척 했다. 일단 난 받긴 받았으니까! 하는 마음으로. 고민은 하고 있으니까! 하면서.
하지만 다시 돌아보면 저 문장들은 온통 다 어디서 빌려온 단어들 뿐이다.
내 공은 나를 향해서 날아오고 있다. 나는 눈 감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다음, 버텨야한다.
일단 공을 올려놓는 게 중요하다. 그러니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배구일지니까 배구학원 사진도 슬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