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 침대에 누워 장강명 작가의 『먼저 온 미래』를 청취 모드로 틀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간밤에 몇 차례 깼다. 3시, 5시, 7시 즈음. 그때마다 책장을 앞으로 돌려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 하면 잠들기 어렵다. 못 잘 바에야 책이라도 듣자는 마음이다. 못 자면 지식이 남고, 자면 휴식이 된다. 아침이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맑아졌고, 마지막 작가의 말은 또렷한 정신으로 들었다.
『먼저 온 미래』는 신기술이 개인의 사유를 어떻게 압도하는지를 성찰하는 책이다. AI는 직업의 사명감마저 바꾸며, 인간의 판단력과 여유를 야금야금 잠식한다. 많은 의사결정이 자동화되고, 인간은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삶'에 익숙해진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편리함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 패턴은 반복된다. 어떤 것들은 더 이상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작가는 그 흐름에 맞서는 방법으로 ‘기준 세우기’를 말한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유, 의미에 대한 질문,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기술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개인이 판단하려면, 최소한의 기준은 필요하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기술을 능동적으로 사용하고 싶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오 전까지 어떤 전자기기도 손에 대지 않기로.
9시 즈음, 반바지와 아크테릭스 풀오버를 입고 러닝화를 신었다. 크로스백을 단단히 매고, 핸드폰은 가장 깊은 지퍼에 넣었다. 결제할 때만 꺼내기로 했다. 약 2km 거리의 슈퍼마켓을 향해 시속 8km로 달리는 상상을 하며, 15분 정도면 도착할 거라 예상했다. 횡단보도에서 조금씩 시간이 늘어 결국 20분쯤 걸렸다.
슈퍼에 도착하자 뛰는 걸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볶음고추장용 다짐육, 참치 두 캔, 50% 세일하는 냉동 오징어튀김 1kg, 숙주, 귤 하나를 샀다.
돌아오는 길. 귤을 까먹으며 여유롭게 거리를 살폈다. 인테리어가 바뀐 가게, 오전 장사가 잘되는 식당, 낯선 로고. 이어폰 없이 걷는 거리는 새삼스러웠다.
늘 양쪽 귀에는 이어폰,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었다. SNS, 뉴스, 숏폼 영상을 넘기며 걷던 거리였다. 오늘은 귀도, 눈도 화면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제야 시야가 다시 주변으로 돌아왔다. 행인들의 표정, 벽면의 타일, 간판의 질감 같은 디테일이 눈에 들어왔다. 잡생각도 많아졌다. 이를테면, 어떤 순서로 요리할지, 오늘은 어떻게 보낼지, 눈과 귀가 열린 상태에서 걷기가 얼마나 즐거운지 등.
집에 도착하자마자 요리를 시작했다. 원래라면 ‘백종원 마약고추장(볶음고추장의 맛있는 이름)’ 레시피를 검색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검색 찬스 없이, 머릿속 조리법을 바탕으로 만들기로 했다. 일본식 조미료 순서인 ‘사시스세소’를 기억하며, 설탕 → 맛소금/다시다 → 참치액 → 미림 → 간장 → 고추장의 순서로 넣었다. 윤기를 위해 물엿을 넣을까 했지만, 간을 보니 충분해 생략했다. 마지막엔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마무리했다.
밥 위에 고추장을 한 숟갈 올리고, 양상추, 어제 남긴 KFC 치킨 텐더를 얹었다. 김가루는 생략했다. 입 안 가득 매콤한 고추장이 퍼지고, 단맛이 가볍게 따라왔다. 어느새 한 공기를 다 비웠고, 남은 소스는 숟가락으로 긁어 먹었다.
식사 후엔 LP플레이어에 다프트펑크의 바이닐을 올렸다. LP도 전자기기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겠다. 맞다. 하지만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선 예외 조항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음악은 허용된 장치로 정해뒀다. 커피를 내리고, 책장을 뒤적였다. 심훈의 『그날이 오면』. 3년 전 한국에서 사 두고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시집이다. 오늘 처음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시를 몇 편 읽고 책을 바꿨다. 조엘 마이어로위츠의 『How I Make Photographs』. 거리 사진의 테크닉과 시선을 설명한 책이다. 이미 읽은 책이라 사진만 훑어봤다. 좋은 사진과 밋밋한 사진이 뒤섞였다. 대가의 작품도 항상 뛰어나진 않다. 나는 한 장에 임팩트가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잔잔한 이미지는 시리즈로 엮지 않으면 감동이 생기기 어렵다. 나에게는 그 집중력이 없다.
책장을 넘기고 있던 중, 로봇청소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설정한 시간은 정오. 기계음이 오늘의 전환점을 알려줬다. 정오, 미션 종료.
나는 컴퓨터를 켜고, 이 글을 쓴다. 이 감각이 조금이라도 오래 남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