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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브런치 파내기

by 띤떵훈



가끔 브런치에 들어간다. 좋아요가 늘었는지, 댓글이 달렸는지, 조회수가 갑자기 튀었는지 확인하려고. 대개 별일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통계 항목을 스치던 중 도발적인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남의 삶』. 4년 전에 쓴 글이다. 오늘 조회수 1이 찍혔다. 도발에 걸렸다. 클릭했다.



(링크: https://brunch.co.kr/@critic/270 )



첫 문단부터 제법이다. “잘생긴 남자의 삶은 어떨까? 그 질문의 답은 내가 들고 있다. 왜냐면 내가 바로 잘생긴 남자이기 때문이다.” 자뻑, 농담, 자기 패러디가 한 문단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지금 읽어도 웃긴다. 이 친구, 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기억, 경험, 신체, 사회적 반응 같은 요소가 나를 나로 규정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변화 가능하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4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읽는 내내 묘한 거리감이 들었다. 내 글인데, 남의 글 같았다. 유쾌한 낯섦. 약간 질투가 났다. 나보다 웃긴데?




웃음 뒤에 드는 생각은 따로 있다. 우선 글맛이 있었다. 문장력이 탁월하진 않아도, 발상과 유머의 결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독창성 있는 글에 매력을 느낀다. 그 글에는 식자층 유머도 있었고, 자뻑과 자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유발 하라리를 인용하는 방식도 능청맞고 자연스러웠다. 중간중간 어이없게 터지는 문장도 좋았다. 지금보다 더 거침없고, 스스로를 더 재미있게 소비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예견되는 지적은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너무 길다. '물론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정도로 정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주제 흐름도 후반부에선 좀 엉킨다. 처음엔 잘생긴 남자의 삶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후반부는 '결혼 후 잔소리 듣는 남편의 삶'이다. 중간에 한 문장만 넣었어도 달랐을 것이다. “잘생김은 시기별로 용도가 다르다” 같은 말 하나만 있어도, 전체 글이 훨씬 정돈됐을 거다.




그 글을 쓴 이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종종 새로운 만남의 상대를 ‘독자’라고 상정한다. 그중 무게 잡는 자리에서 만난 사람도 있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이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일까? 『잘생긴 남자의 삶』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조금 멋쩍다. 하하, 제가 예전에 이런 글도 썼습니다. 지금은 안 이래요. 잠깐만요, 화장실 좀… 이럴 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는 게 도움이 된다. 민망함의 벽을 낮출 수 있다.




결국 과거의 글은 부끄러우면서도 재밌다. 시간이란 게 글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독자의 시선으로 나를 읽을 수 있다. 거울이 아니라, 창으로 본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래서 기록은 의미 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남긴 글은 내 인생의 아카이브다. 돌아볼 수 있는 지점이 되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과거를 만들어준다.




그 부끄러움을 나는 ‘파묘’라고 부른다. 무덤을 파는 일이다. 과거의 나를 다시 꺼내는 작업. 어떤 글은 여전히 웃기고, 어떤 글은 못 견디게 유치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파묘할 것이다. 미래의 나도 분명 지금의 글을 부끄러워할 테니까. 그러니 묘지는 자주 정비해두는 게 좋다. 팔 묫자리가 있으면, 덜 심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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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가끔 브런치에 들어간다. 좋아요가 늘었는지, 댓글이 달렸는지, 조회수가 갑자기 튀었는지 확인하려고. 대개 별일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통계 항목을 스치던 중 낯선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남의 삶』. 4년 전에 쓴 글이다. 오늘 조회수 1이 찍혔다. 그 제목이 묘하게 눈에 걸렸다. 클릭했다.



(링크: https://brunch.co.kr/@critic/270)



첫 문단부터 제법이다. “잘생긴 남자의 삶은 어떨까? 그 질문의 답은 내가 들고 있다. 왜냐면 내가 바로 잘생긴 남자이기 때문이다.” 자뻑, 농담, 자기 패러디가 한 문단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지금 읽어도 웃긴다. 이 친구, 재간이 보통이 아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기억, 경험, 신체, 사회적 반응 같은 요소가 나를 나로 규정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변화 가능하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4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읽는 내내 묘한 거리감이 들었다. 내 글인데, 남의 글 같았다. 유쾌한 낯섦. 약간은 질투도 느껴졌다. 나보다 웃긴데?




웃음 뒤에 드는 생각은 따로 있다. 우선 글맛이 있었다. 문장력이 탁월하진 않아도, 발상과 유머의 결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독창성 있는 글에 매력을 느낀다. 그 글에는 식자층 유머도 있었고, 자뻑과 자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유발 하라리를 인용하는 방식도 능청맞고 자연스러웠다. 중간중간 어이없게 터지는 문장도 좋았다. 지금보다 더 거침없고, 스스로를 더 재미있게 소비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예견되는 지적은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너무 길다. '물론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정도로 정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주제 흐름도 후반부에선 좀 엉킨다. 처음엔 잘생긴 남자의 삶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후반부는 '결혼 후 잔소리 듣는 남편의 삶'이다. 중간에 한 문장만 넣었어도 달랐을 것이다. “잘생김은 시기별로 용도가 다르다” 같은 말 하나만 있어도, 전체 글이 훨씬 정돈됐을 거다.




그 글을 쓴 이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종종 새로운 만남의 상대를 ‘독자’라고 상정한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이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일까? 『잘생긴 남의 삶』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조금 멋쩍다. 하하, 제가 예전에 이런 글도 썼습니다. 지금은 안 이래요. 잠깐만요, 화장실 좀… 이럴 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는 게 도움이 된다. 민망함의 벽을 낮출 수 있다.




결국 과거의 글은 부끄러우면서도 재밌다. 시간이란 게 글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독자의 시선으로 나를 읽을 수 있다. 거울이 아니라, 창으로 본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래서 기록은 의미 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남긴 글은 내 인생의 아카이브다. 돌아볼 수 있는 지점이 되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과거를 만들어준다.




그 부끄러움을 나는 ‘파묘’라고 부른다. 무덤을 파는 일이다. 과거의 나를 다시 꺼내는 작업. 어떤 글은 여전히 웃기고, 어떤 글은 못 견디게 유치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파묘할 것이다. 미래의 나도 분명 지금의 글을 부끄러워할 테니까. 그러니 묘지는 자주 정비해두는 게 좋다. 팔 묫자리가 있으면, 덜 심심하다.











가끔 브런치에 들어간다. 좋아요가 늘었는지, 댓글이 달렸는지, 조회수가 갑자기 튀었는지 확인하려고. 대개 별일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통계 항목을 스치던 중 낯선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남의 삶』. 4년 전에 쓴 글이다. 오늘 조회수 1이 찍혔다. 그 제목이 묘하게 눈에 걸렸다. 클릭했다.(링크: https://brunch.co.kr/@critic/270)첫 문단부터 제법이다. “잘생긴 남자의 삶은 어떨까? 그 질문의 답은 내가 들고 있다. 왜냐면 내가 바로 잘생긴 남자이기 때문이다.” 자뻑, 농담, 자기 패러디가 한 문단 안에 다 들어 있었다. 지금 읽어도 웃긴다. 이 친구, 재간이 보통이 아니다.뇌과학에 따르면 인간은 현재에만 존재한다고 한다. 기억, 경험, 신체, 사회적 반응 같은 요소가 나를 나로 규정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변화 가능하다.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 4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읽는 내내 묘한 거리감이 들었다. 내 글인데, 남의 글 같았다. 유쾌한 낯섦. 약간은 질투도 느껴졌다. 나보다 웃긴데?웃음 뒤에 드는 생각은 따로 있다. 우선 글맛이 있었다. 문장력이 탁월하진 않아도, 발상과 유머의 결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독창성 있는 글에 매력을 느낀다. 그 글에는 식자층 유머도 있었고, 자뻑과 자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갔다. 유발 하라리를 인용하는 방식도 능청맞고 자연스러웠다. 중간중간 어이없게 터지는 문장도 좋았다. 지금보다 더 거침없고, 스스로를 더 재미있게 소비하던 시절이었다.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예견되는 지적은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의 궤적을 그리는 게 아니란 사실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알겠지만, 너무 길다. '물론 모든 잘생긴 남자가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정도로 정리했으면 좋았을 텐데. 주제 흐름도 후반부에선 좀 엉킨다. 처음엔 잘생긴 남자의 삶을 이야기하겠다고 했지만, 후반부는 '결혼 후 잔소리 듣는 남편의 삶'이다. 중간에 한 문장만 넣었어도 달랐을 것이다. “잘생김은 시기별로 용도가 다르다” 같은 말 하나만 있어도, 전체 글이 훨씬 정돈됐을 거다.그 글을 쓴 이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종종 새로운 만남의 상대를 ‘독자’라고 상정한다. 그리고 상상해본다. 이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일까? 『잘생긴 남의 삶』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조금 멋쩍다. 하하, 제가 예전에 이런 글도 썼습니다. 지금은 안 이래요. 잠깐만요, 화장실 좀… 이럴 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구분 짓는 게 도움이 된다. 민망함의 벽을 낮출 수 있다.결국 과거의 글은 부끄러우면서도 재밌다. 시간이란 게 글에 객관성을 부여한다. 독자의 시선으로 나를 읽을 수 있다. 거울이 아니라, 창으로 본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래서 기록은 의미 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남긴 글은 내 인생의 아카이브다. 돌아볼 수 있는 지점이 되고, 웃고 넘길 수 있는 과거를 만들어준다.그 부끄러움을 나는 ‘파묘’라고 부른다. 무덤을 파는 일이다. 과거의 나를 다시 꺼내는 작업. 어떤 글은 여전히 웃기고, 어떤 글은 못 견디게 유치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파묘할 것이다. 미래의 나도 분명 지금의 글을 부끄러워할 테니까. 그러니 묘지는 자주 정비해두는 게 좋다. 팔 묫자리가 있으면, 덜 심심하다. 선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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