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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 낭비

by 띤떵훈



전날은 금요일이었다. 해야 할 일 목록이 있었다. 하나도 실행하지 않았다. 나는 대체로 자신에게 너그럽다. 계획의 일부만 비워도 ‘휴식’이라 부른다. 하지만 전부를 비웠을 때는 말이 달라진다. 그건 휴식이 아니라, 압도적 낭비다.



원래의 금요일은 이렇게 흘러야 했다. 오전에 시티로 나가 커피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고,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 오후 여섯 시 즈음 퇴근한 친구 둘과 볼더링 짐으로 향한다. 90분가량 운동을 하고, 8시에는 친구 집에서 네 명이 저녁을 함께 먹는다.



현실은 첫 단계부터 어긋났다. 아침 러닝을 했다. 헬스장에서 30분 뛰고 1분 걸었고, 가볍게 샌드백을 쳤다. 무쇠소녀단 2에서 본 콤비네이션을 적용해 주먹을 몇 번 휘두르니, 기분은 단기 챔피언급이었다. 샤워를 하고 바로 시티로 나설 계획이었지만, 노곤함이 샤워를 막았다. 예전엔 30분만 뛰어도 땀이 범벅이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땀을 거의 흘리지 않았으니 침대에 누워도 찝찝하지 않다. 몸이 변했고, 변한 몸은 게으름의 구실이 된다.



점심이 다가왔다. 밥솥에 남은 밥과 전날 만든 마파두부가 있었다. 샐러드를 곁들여 마파두부덮밥을 먹었다. 애매하게 남은 밥은 마약 고추장에 비벼 마무리했다. 탄수화물 비중이 90%인 식사다. 운동 후의 나른함과 식사의 포만감이 합쳐졌다. 침대가 다시 손짓했다. 먹고 바로 눕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아침 운동이 면죄부 역할을 했다.



눈을 뜨니 오후 두 시. 함께 운동하기로 한 친구들이 사정이 생겨 볼더링 약속이 취소됐다. 혼자 갈까 고민했다. 전날 저녁에 2시간 넘게 강도 높은 볼더링을 했다. 손가락 관절이 회복되지 않았다. 초록 문제부터는 손가락 두세 개로 체중을 버티는 동작이 잦다. 회복이 더뎌 무리하면 부상으로 이어진다. 갈 이유보다 안 갈 이유가 더 설득력 있었다.



남은 하루는 길었다. 그때 KFC 앱에서 ‘위키드윙 8개 8불’ 딜이 떴다. 치킨은 불금의 상징이다. 저녁 메뉴를 정했다. 몸을 움직일 겸, 마트에서 생필품을 사고 KFC까지 30분 러닝을 했다. 치킨을 배낭에 담고 걷기와 러닝을 섞어 귀가했다. 오후 다섯 시, 애매하게 이른 저녁이었지만 치킨은 식으면 손해다. 라면을 끓였다.



인간은 대단치 않고, 나는 인간이다. 운동과 식사 후 나른함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도 침대가 승리했다. 누워서 ‘환생 부교주’를 들었다. 전생의 기억으로 비극을 막으려는 무협 부교주의 이야기. 뇌를 비우고 듣기엔 이만한 게 없다. 이번에도 부교주는 악당의 계획을 방해한다. 악당에게 분골착근의 고문을 시행하는 중 나는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새벽 2시 반. 이미 8시간 숙면에 낮잠까지 더해졌다. 너무 오래 자면 건강에 해롭다는 2025년식 의학 정보가 스쳤다. 그러나 지나치게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다. 두 악영향을 저울질해, 아침에 일어나기로 했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숏폼 영상을 보고, 음악을 듣고, 다시 소설을 청취 모드로 들었다.



7시 반에 기상했다. 허리와 등이 뻐근했다. 하루 절반을 잔 대가였다. 전날 샤워를 건너뛰었다. 자신의 체취가 느껴졌다. 21세기에서 체취는 사라져야 할 불편한 신호다. 곧바로 욕실로 가서 치석 제거, 치간 칫솔, 치실, 양치, 가글을 하고, 머리를 두 번 감았다. 몇 가닥 올라온 수염을 뽑고, 드라이기로 뿌리까지 말린 뒤 컬 크림을 바르고, 기초 화장품을 얼굴에 발랐다. 히트텍 위에 캐시미어 10%가 섞인 폴로 케이블 니트를 입었다. 슬랙스에 구두를 신고, 경량 패딩을 걸쳤다. 노트북이 든 브리프 케이스를 들고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운전했을 길이다. 오늘은 산책을 겸했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 카페 오픈 시간까지 10분, ‘환생 부교주’의 모험담으로 시간을 메웠다.



문이 열리자 첫 손님으로 들어가 롱블랙을 주문했다. 자리에 앉아, 전날의 기록을 시작했다. 블로그야, 내가 말이야 어제 압도적으로 낭비했어. 그리고 아마, 다음에도 비슷하게 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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