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다 바빠— 그 뒤에 오는 말은 현대 사회. 어느새 숙어처럼 익숙해진 문장이다. 최근 플레이하는 모바일 게임 탑 히어로즈에서도 일꾼들이 일을 시작할 때마다 같은 대사를 내뱉는다. "바쁘다 바빠!" 시대적 배경은 판타지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현실과 닮았다. 게임 속에서 집을 짓고, 노동하는 유닛들의 반복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단면을 비춘다. 결국 게임도 사회를 반영하니까.
나는 바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 “요즘 바쁘죠?”라고 물으면, 대개 “그래 보이나요? 저 하나도 안 바빠요”라고 답한다. 그러니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 덧붙인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쁘다’는 말이 바쁨을 불러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정은 습관이다. 『감정은 습관이다』의 저자가 말하듯, 인간의 감정은 유익함보다 익숙함을 따른다. 원시 시대엔 익숙함이 곧 안전이었다. 생존이 우선이던 시대엔 변화가 곧 위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문명이 발달한 사회에서 익숙함은 안전과 무관하다. 그저 반복된 자동 반응일 뿐이다.
입버릇처럼 “바쁘다”를 반복하면, 뇌는 그 상태를 기본값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를 다시 바쁜 방향으로 이끈다. 물론 바쁨은 감정이 아니라 현상이다. 그러나 바쁨이 불러오는 정서적 부산물은 명확히 감정이다. 그것은 ‘혼란’이다. 혼란은 명분을 준다. 무언가를 제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대충 넘겨도 괜찮다는 자기합리화. 결국 바쁨은 혼란의 다른 이름이다.
나는 이미 여유에 익숙하다. 그리고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하루를 보내다 보면 작은 일들이 정신의 균형을 흔든다. 그럴 때마다 글을 쓴다. 글을 쓰면 생각이 줄 세워진다. 무엇이 지금 해결 가능한 일이고, 무엇이 기다려야 하는 일인지 분류된다. 해결 가능한 것은 바로 처리하고, 나머지는 처리 가능한 시점으로 미룬다. 잊지 않기 위해 캘린더에 적는다. 이 단순한 기록이 생각보다 많은 불안을 잠재운다. 걱정의 대부분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막상 손을 대면 1분도 걸리지 않는 일들이 쓸데없는 압박을 준다. ‘해야지’라는 생각만으로도 정신력의 일부가 소모된다. 해결을 미루면, 마음의 탭이 계속 열린 채로 남는다.
내 일의 본질은 사업이다. 사업은 늘 미지의 영역을 다룬다. 새 아이템을 검토하고, 사람을 만나고, 실행과 리스크를 동시에 감수해야 한다. 새로운 일을 벌이지 않으면 정체되고, 벌이면 불안해진다. 그 모순 속에서 일한다. 그래서 사업은 본래 ‘정신없음’이 기본값인 사람에게 유리하다. 낯선 상황을 불편해하지 않고, 계획보다 즉흥이 많은 사람. 그런 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잡는다.
나는 그 기질이 부족하다. 계획을 세우고 정리하는 편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일을 벌인다. 불편할 만큼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그 불편을 밀고 간다. 그리고 그 이후엔 가능한 한 빠르게 정리한다. 일을 끝내고 다시 여유로 돌아온다. 그게 나의 강점이다. 여유가 있어야 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바로 처리할 수 있다. 여유는 나의 기본값이고, 빠른 실행의 전제조건이다.
이 리듬이 나를 만든다. 여유—정리—행동—다시 여유. 바쁜 상태를 오래 두지 않는다. 여유 상태로 복귀하기 위해 일의 매듭을 짓는다. 여유는 멈춤이 아니라 회복의 기술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바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여유로워야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사업은 나에게 늘 새로운 긴장을 요구한다. 여유에 절여져 있으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다. 시행착오만큼 사업의 기술 알려주는 선생님이 없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일을 벌린다. 일정한 긴장은 내가 다시 배우고, 시도하고, 성장하도록 만든다. 여유를 기본으로 두되, 필요할 때는 바쁨을 불러오는 것이다. 인생이 전쟁이라면 무수히 많은 전투를 겪고 버텨야 한다. 여유로운 사람으로서 많은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꾸역꾸역 입영신청서 작성해야 한다.
나는 여유를 디폴트로 두되, 그 위에 계속 배운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할 일을 만들고 실천한다. 여유는 내 기반이고, 앎은 내 보완이다. 결국 내 삶은 여유를 회복하기 위한 반복적인 실험이다. 문제를 만들고, 곧바로 문제를 해결하고 이내 여유로 돌아간다. 안 바쁨이 습관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