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 작가가 떠난 뒤.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를 생각한다. 의무적으로 상기시켰던 며칠이 지나고, 마음이 아파 애도는 이쯤 하자, 생각한 뒤에도 이제는 관성처럼 그녀가 매일 떠오른다.
모르겠다. 나는 그녀를 기리며 매일을, 시간을, 그리고 순간을 버리지 않으려 애써 힘을 내다가도, 이런 식으로 그녀가 갈망했던 내일을 대신해서 살아가는데 죄책감을 느낀다. 대신이 아닌 걸 안다. 대신할 수 없다는 것도. 단지 그녀가 바랐던 날들을 누릴 자격이 내겐 없다는 데에서 나는 일종의 껄끄러움을 느낀다.
그녀가 하늘로 떠난 뒤 나는 문득 삶이 허망했고, 이어 죽음이 허망해졌고, 그러니 나를 언제나 옥죄어오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줄어들었다. 어릴 적부터 잠 못 들 정도로 나를 공포에 떨게 하던 ‘죽음’은 나를 압도하는 미지의 공백이 아니었다. 그보단 허무한 종결이었다. 아니 종결이라고 부르기에도 허무한 무언가였다. 이처럼 멀리서 마음 깊이 응원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끝을 맺자 무상은 커지고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문득 무서워졌던 것이다. 이제 나를 지탱해 주는 건 뭐가 남아있을까 싶어서.
나를 삶의 끝자락에서 붙잡아줬던 건, 그러니까 끝자락 밑 구렁텅이로부터 보호해 줬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구렁텅이였다. 나는 간혹 죽음을 떠올리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끝의 끝이 못 견디게 공포스러워져 소스라치게 뒤로 물러서곤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동안 나를 안전하게 해 줬다. 덕분에 하찮은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힘들고 우울해도 절대 죽음까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야. 사실 그 이유는 내가 편집증적인 겁쟁이여 서지만, 나는 마치 그 때문이 아닌 척하면서, 죽음을 생각하기엔 내가 아직 충분히 강한 사람이어서 그런 것처럼 굴었다. 그 정도로 망가지거나, 약하거나, 나락에 선 사람은 아닌 것처럼. 나만 아는 기묘할 만큼 당당한 마음이 있었다. 적어도 이런 면에선 가족을 안심시킬 수 있다는 자긍심 같은 거. 하지만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자 나는 두려워졌다. 나를 지켜줄 게 더 이상 없는 기분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두려움을 허무로 바꿔준 남경작가가,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충동을 더 쉽게 만들어 준 누군가가, 매일 살아갈 의지를 주고 있다는 건 참 이상하고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이 의지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의지가 꺾여 구렁텅이로 직접 떨어진다면 슬프겠지만, 애초에 구렁텅이에서 산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을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면 죽음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에겐 그렇게도 지키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게 굴었던 삶이란 것이, 다른 누군가에겐 견디기 힘들 만큼 고통을 주고 있었다는 걸 생각한다면 역시 삶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 모두에게 삶은 다정하지 않았다. 혹은 다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다른 누군가의 은유에서조차 마음이 동해 의미부여를 하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더 더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괜히 안타까워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