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록산, 나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못생기고 흉칙하게 솟아오른 큰 코 때문에 당신 앞에 나서지 못하고, 오히려 잘생긴 친구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러브레터를 대신 써 보내며 진심을 눌러 적던 사람.
훗날 세상 사람들이 본인의 정체를 감추고 대신 남들의 사랑을 대필하거나 조작하려 하는 이들의 대명사로 쓰는 내 이름, 시라노. 본명은 사비니앙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난 당신과 함께 17세기를 살아간 프랑스의 군인, 시인, 극작가였소. 세상은 모두 나의 문학적 재능과 검술의 명성을 이야기 했지. 나를 아는 이들은 ‘말과 칼’로 살아간 내 인생을 기억할 거야. 늘 남의 모습을 빌어 편지를 쓰느라 당신에게 내보일 수 없었던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당신에게 해 볼까 하오.
출생과 성장
나는 1619년 파리 근교에서 태어났소.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았고, 교육을 통해 철학과 문학에 깊이 몰두하게 되었지. 하지만 나는 글만 쓰는 문인이 아니라, 싸움을 즐기고 검술을 배우며 군인의 삶도 병행했어. 열정적이고 다혈질이었지만 동시에 로맨틱하고 감성적인 면도 많았지.
난 흉칙한 외모를 가졌지만, 늘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군인으로서의 삶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은 군대에서의 삶이었소. 나는 삼십 년 전쟁 당시 군에 들어가 여러 전투에 참전했고, 특히 내 검술 실력은 대단했지. 많은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며 나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켰어. 그러나 나의 외모—특히 큰 코로 인해 사람들에게 종종 놀림을 당하곤 했지. 하지만 나는 내 외모를 웃음거리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자존심과 유머로 넘겼어. 내 뛰어난 검술 실력 때문에 함부로 내 앞에서 내 외모를 놀리는 이들은 다행히 많지 않았소.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자신이 내겐 늘 있었고, 누구와 만나도 불안한 적이 없었소.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문학과 사랑
난 군인으로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타고났지. 나는 희곡, 시, 철학적 작품을 남겼는데, 정작 날 유명하게 만든 건 날 주인공으로 삼아 쓴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요. 내 비극적인 일생을 담은 이 이야기에서 나는 아름다운 록산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친구 크리스티앙을 위해 편지를 써주며 내 사랑을 숨기지. 내 아름다운 말과 시로 당신의 마음을 얻지만, 당신이 반한 건 편지를 쓴 내가 아닌 편지를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 내 친구 크리스티앙, 난 그 친구를 위해 당신을 향한 사랑을 끝내 고백하지 않지.
내 인생을 그린 작품이라곤 하나, 실상은 당신을 만나면서부터의 이야기가 내 삶의 전부나 다름 없소.
작품의 내용 뿐 아니라, 내가 살아 온 인생 또한 당신을 만나면서부터가 진짜 시작이자 끝이라 감히 고백하오.
내 뛰어난 글쓰기 능력이 스스로 대견하고 다행스러웠던 것도 당신을 만나면서부터였소.
당신이 내 문학의 시작이고, '기술' 과 '재능'으로 쓰는 것이 아닌 '진심'과 '마음'을 담아 쓰기 시작한 내 진짜 글쓰기의 시작이었소.
시와 철학
나는 철학적 사색가이기도 했어. 자유정신을 중요하게 여기며, 종교적 관습이나 사회적 규범에 대해 비판적이었지. 나의 작품 중 일부는 당대의 상식을 깨는 혁신적인 사상들을 담고 있었소. 나는 하늘과 별들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해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도 썼어. ‘달세계 여행’ 같은 작품이 그런 상상력의 결과물이지.
끊임없이 쌓아 온 지식과 철학들 위에 끝없이 자유롭게 펼쳐지던 나의 상상력과 틀을 깨는 생각의 자유로움.
난 누구와 만나도 화제와 대화가 끊이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실제 그랬소.
당신과 마주칠 때마다 얼어붙던 긴장과 내 자신이 초라해지고 자신 없어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나로선 일찌기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과 결핍이었소.
당신 앞에서 비로소 난 내 초라함을 되돌아 보게 되었지.
내겐 사랑 앞에 내세울 문학적 성과나 철학의 깊이 따윈 단연코 없소.
당신을 향한 사랑이 그걸 돕고 완성시킬 뿐이오.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내 삶에서 사랑은 늘 비극적이었소. 난 그걸 인정하며 살아 오지 않았지만 당신과 만나 결국 나는 절망적인 사랑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 나는 항상 내 큰 코 때문에 록산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잘생긴 내 친구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빌어 그의 이름으로 보내는 편지에서나 간신히 난 다시 당신을 향해 구겨져 있던 내 마음을 펼 수 있었소. 편지 안에서만 난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을 향한 사랑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외침을 끄집어 낼 수 있었지. 당신을 알게 된 이후, 난 오로지 당신을 향해 쓴 편지글 안에서만 살았소. 그 편지지 안에서, 당신을 향한 마음이 담긴 편지가 담기던 봉투 안에서만 난 봉인되고도 자유를 얻었소.
결국 당신은 모든 것을 버리고 수녀원에 들어간 후에야 편지를 쓴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그 편지들에 담긴 진심도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그 진실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은 채, 내 마지막 순간까지 내 사랑을 지켰소. 죽음조차도 나의 진심을 지울 수 없었지.
난 당신에게 늘 편지 안에서 사랑받던 사람일 뿐이니까...
재능이 주는 자신과 불안.
록산, 난 당신을 만난 이후 이내 사랑에 빠졌지만, 당신 앞에 나를 드러낼 수 없었소.
불안했으니까...
나의 글과 나의 진심은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난 자신이 없었소.
그저 잘 쓴 글만으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난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으며 살아온 온 일생을 통해 처음 깨달았소. 그 재능에 자신이 있었으면 난 당신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을 거요. 세상에는 자신의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는 사람들이 많소. 무식함이나 경박함을 자신의 부요함으로 가리는 사람도 있고, 가난이나 유약한 신체적 약점을 다른 특출난 장점으로 가려보려 애쓰는 이들도 많소. 나도 마찬가지요. 난 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이나 무술 실력을 내세워 내 겉모습을 포장하며 살아왔소. 충분히 내 부족함을 가리고도 남을 장점이고 재능이라 생각했소.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시라노가 정말 잃을까 두려워 했던 것
어쩌면, 내가 당신 앞에 편지를 쓴 사람이 시라노 나 자신임을 밝히는 것을 주저한 이유는 크고 흉칙한 코와 외모 때문이 아니라, 내 약점을 가리우고도 남는다 자부했던 내 재능과 실력으로도 당신을 쟁취하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오. 그건, 나에게 남은 유일한 자신감과 재능을 잃는 거나 마찬가지일테니까...
사람들은 대개 용기를 내 고백하고 상대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 그저 주변인으로 머물면서라도 상대로부터 조금의 관심이라도 받는 것으로 안도하는 경우가 있지. 난 적당히 당신의 생활 반경 안에 머물며 당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선택을 하는 동시에 알량한 내 재능에 대한 가치를 유지하는 비겁함의 줄타기를 선택한 거요.
맞소, 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난 당신을 잃는 것보다, 내가 갖고 있다고 생각한 재능과 장점이 당신에게 실연당하는 것으로 무력화 되는 것이 더 두려웠던 거요.
그건 나에게 그저 흉칙한 외모만 남기게 되는 일이라 생각했던 거지. 어리석게도 말이오..
난 틀린 선택을 했소.
내가 믿어야 할 것은 그저 당신을 향한 내 진심어린 사랑이었어야 했소.
당신이 편지 속에서 발견한 것은 오로지 그것이었으니까...
당신이 전장의 크리스티앙에게 "예전에는 당신의 외모를 사랑했지만 이제는 그 영혼만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 때문에 결국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거짓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여기고 동시에 시라노의 사랑을 눈치채 전장에서 죽게 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지. 록산 당신이 나 시라노가 그 모든 사랑 고백의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단 한 사람을 사랑했고, 그를 두 번씩이나 잃는구나!"라며 슬퍼했던 이유 또한 그 진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소... 뒤늦게...
당신이 사랑한 영혼의 진짜 이름, 시라노
록산,
난 당신에게 끝까지 편지의 주인공이 크리스티앙이 아닌 바로 시라노, 나였음을 밝히지 않았소.
내 죽음에 이르러서야 당신은 그 편지를 쓴 게 나였음을 알아챘지.
록산, 내 사랑.
당신에게 나를 밝히고 처음으로 쓰는 이 편지가 얼마나 잘 쓰여진 글인지는 이제 나에게 중요치 않소.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 모르지만,
당신이 받을 편지의 봉투 안에는, 편지 안에는..
나 시라노의 진심과 있는 그대로의 전부가 들어있을 뿐이니, 부디 그 모두를 읽어 주기 바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