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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사회의 빙하 아래 들여다보기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서평

by 서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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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아래를 들여다본다는 것

3년 전, 회사를 나와 컨설팅을 시작한 한 이유는 단순했다. 다양한 조직들의 ‘빙하 아래’를 들여다보고, 거기서 뭔가 바꿔보며 성장하고 싶었다. 조직의 빙하 위에 드러난 조직의 빙하 위에 드러난 모습들—제품과 서비스, 실적, 홈페이지에 걸린 핵심가치 같은 것들은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제도, 리더십, 문화, 일하는 방식 같은 내면은 외부자에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당사자들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마치 다른 행성을 탐사하듯 다양한 조직을 만났다. 지방의 자동차 부품 중견기업, 시리즈 C 투자를 유치한 스타트업, 공공기관, 협동조합, 시민단체까지. 작년 한 해에만 17곳의 조직과 프로젝트를 하거나 자문을 제공했으니, 은근히 많이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 계속 궁금했다. 뉴스에서 접하는 공무원 퇴사 현상, 별다른 실효성 없어 보이는 인사혁신처의 대응책을 보며—공무원의 일하는 방식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대체 그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그러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공직사회의 가짜 노동을 비판하는 작가의 인터뷰를 보고, 바로 책을 주문했다. 그 책이 바로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이다.



이게 공무원만의 문제일까? 그게 아닌 게 문제다.

책 초반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는 어려움은 다 겪는 거 아냐? 공직사회만의 문제는 아니지.” 하고 넘기려다 멈칫했다.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 오히려 지금의 문제를 고착시키고 있다는 사실. 그게 진짜 문제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방식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고, 그 현실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구조적인 모순이었다. 그리고 그걸 바꾸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나조차, 그 현실을 가볍게 넘기려 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책을 읽으며 영화 〈다음 소희〉가 떠올랐다. 나는 종종 이 영화를 ‘KPI에 대한 왜곡’을 다룬 영화라고 소개하곤 한다. 영화 속에서 한 고등학교 실습생의 죽음을 파헤친 형사가 마주한 진실은 이랬다. 누구도 악의적으로 누군가를 죽이진 않았지만, 누구나 죽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했다. 노한동 작가는 어쩌면 그 형사와 닮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 하며 넘겨온 문제를 문장으로 붙잡고, 책으로 꺼내놓았다. 그 집요함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보고서 1장에 담긴 착시

특히 이 문장은 읽으면서 박수를 쳤다.

“세상엔 1장짜리 보고서로 모두 담을 수 없는 문제들이 가득하다. 문제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거나 다양한 요인이 얽혀 있으며, 해결 방안 역시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부 보고서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도 ‘핵심만 간단하게’라는 원칙에 경도된다. 보고서 1장에 모든 내용이 깔끔하게 담길 수 있도록 문제점과 원인, 해결 방안을 2~3가지의 맥락으로 포섭하고, 서로 조응되게 구성하여 현실을 의도적으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실타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복잡한 현실의 이해관계는 몇 가지의 단순한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치환된다.”

많은 조직들이 갖고 있는 제도, 리더십, 문화가 결합된 시스템은 실제로 일하는 방식의 혁신, 변화를 위한 문제해결보다는 보고와 결재에 익숙한 ‘평탄화’에 기여한다. 그렇게 의도되고, 학습된 ‘평탄화’는 그 자체로 진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제약요인이 된다. (사실 이런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한 방법으로 자주 언급되는 사례 중 하나가 아마존의 ‘6-pager’다. 아마존은 맥락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정렬(align)을 이루기 위해 파워포인트 사용을 금지하고, 회의 시작 전 모든 참석자가 6페이지 분량의 내러티브 메모를 읽은 후 논의를 시작한다. 1페이지짜리 개조식 보고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충분히 존재하는 셈이다.)



직무오너십이 사라진 조직

이번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심판결정문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그 ‘소극적인 임무 수행’이 MZ계엄군의 인식 변화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지만, 나는 다르게 본다. 공직사회는 이미 블랙리스트 사태 등 여러 경험을 통해, 부정적인 학습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일종의 ‘의도된 태업’이 선행되었고, 그 위에 신중한 저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 결과가 긍정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덕분’이지만, 이제부터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가?”이다.



문제는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이 책이 특별히 의미 있는 지점은 공직사회의 문제를 단순히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권한과 책임'이라는 본질로 정면 돌파했다는 점이다.

저자가 말하듯, 대한민국은 과거 발전국가 시기에는 관료들이 사회 의제를 설정하고 정책을 결정했지만, 민주화가 본격화된 이후부터는 그 권한을 정치권과 점점 더 많이 나누게 되었다. 즉 주피터 형에서 헤라클레스 형으로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관료가 겪는 권한과 의무의 불일치 문제를 강조하면서 관료의 선의와 책임감을 믿고 자율성을 보장하는 방향의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서 정책 의사결정에 대한 거버넌스가 무거워짐에 따라서 행정조직의 직무오너십이 약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공직사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는 거버넌스 전문가가 아니지만, 공직사회의 현실은 책에서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복잡할 것이라 생각한다. 공직 내부의 자정 노력과 더불어, 정치권이 행정조직을 어떻게 활용하고 견제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절실하다. 결국 중요한 건 ‘역할과 책임(R&R)’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정치는 시민의 삶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이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행정은 실행 과정에서 생기는 복잡한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즉 연금개혁, 노동개혁, 젠더갈등처럼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루는 문제들일수록 정치가 더욱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기업에 비유하자면, 정치는 비전과 전략을 책임지고, 행정은 실행과 개선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여전히 품의와 결재 중심으로 굴러가는 행정 시스템은 이제 혁신이 필요하다. (‘충주맨’의 성공이 ‘결재 없는 업로드’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탄핵 이후 사회 개혁의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공직사회 일하는 방식의 지체현상에 있다는 점을 우린 모두 알고 있다. 결국 해답은 단순하다. 마법 같은 한방은 없다. 오너십을 회복하려는 꾸준한 회고와 개선이야말로, 120만명에 육박하는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 일다운 일’을 제대로 해나갈 수 있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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