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쌀, 재난, 국가』
오늘은 이철승 교수의 저서 『쌀, 재난, 국가』(부제 : 한국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책의 내용을 주관적으로 발췌하고 요약한 글이니, 원문도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이 책은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문화와 제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합니다. 이철승 교수는 동아시아와 서구 사회를 갈라놓은 근본적인 차이를 '쌀과 밀'이라는 식량 작물에서 찾습니다. 서구의 개인주의, 동아시아의 집단주의는 문화나 사상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 체제와 깊게 맞닿아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냅니다.
쌀 농사는 밀농사와 달리, 많은 물과 집단적 협업을 필요로 했습니다. 마을 단위로 수로를 관리하고 재난에 대비하며 협동해야만 생존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협업은 동시에 상호 감시와 경쟁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잘 뭉치고 협력하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비교하고 위계를 따지는 문화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이 책은 벼농사 체제가 어떻게 공동체 조직, 위계 문화, 그리고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냈는지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추적합니다. 특히 한국 기업의 임금·인사제도에 뿌리내린 연공제의 기원과 문제를 탐구하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인사관리의 딜레마를 짚어냅니다.
저자는 동아시아 엘리트들이 근대 발전국가를 건설하면서 활용한 시민사회 하부구조가 벼농사 생산 양식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발전한 마을 단위 공동체 조직과 위계구조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벼농사 생산양식의 일부로서 형성된 가족 세대 간, 그리고 또래 세대 내부의 협업 시스템이 동아시아 사회의 기원이며, 이 협업을 통한 농업기술의 표준화 및 평준화 시스템이 동아시아 마을 기업에서 축적되어온 인적 자본의 핵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화적 DNA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한국 사회에서 위계란 일상의 질서이자 숨 쉬는 공기와도 같습니다. 우리는 협업을 탁월하게 수행하면서도 동시에 비교와 서열을 세밀하게 따집니다. 이 위계와 협업의 문화적 DNA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특징이 아니라, 기업의 임금체계와 조직 운영 방식에까지 깊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 즉 벼농사에서 비롯된 협업과 위계가 어떻게 연공제로 이식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한국 사회의 인사관리의 딜레마로 이어졌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960년대 한국의 공장과 사무실에는 '숙련'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산업화 세대의 기업 리더들이 조직을 건설하며 부딪힌 여러 가지 문제 중 하나는 보상체계였습니다. 없는 기술은 밖에 나가 배워오면 되고, 없는 자본은 정부에 줄을 대서 빌려오면 되었지만, 잔뜩 뽑아서 채워놓은 공장과 사무실의 인력들에게 어떻게 보상을 할지는 아무런 기준이 없었습니다. 직무 평가 시스템을 마련하고 숙련 수준에 맞춰 보상을 하기에는 시간도, 인력도, 노하우도 없었습니다.
이 공백을 채워준 것이 바로 동아시아 마을 공동체의 '연공 시스템'이었습니다. 동아시아 기업의 연공제는 두 가지 가정을 농촌공동체로부터 이식했습니다. 하나는 나이가 들수록 숙련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라는 가정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간의 숙련 차이는 세대 내부의 협업과 조율에 의해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좁혀질 것이라는 가정입니다. 이 두 가정은 현장에서 실제로 실현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직무평가를 건너뛰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연공 문화는 동아시아 기업 조직의 뼈대인 연공제로 재탄생합니다. 동아시아 기업들은 입직에서부터 퇴직에 이르는 개인의 생애를 동일한 임금 상승 테이블을 공유하는 세대들로 쪼개어 위계 구조를 만드는 동시에 세대 단위 협업 시스템을 창출했습니다. 동아시아 마을 공동체의 수직-수평 기술 튜닝 시스템은 동아시아 기업 조직에서 연공제를 매개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가족 같은 기업' 안에서 부장님은 부모의 역할을, 선배는 이웃 어른들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입사 동기는 동년배 사촌들 및 동네 친구들과 다름없었습니다. 그들은 동아시아 마을 공동체처럼 긴밀하게 엮인 공식·비공식 네트워크 안에서 협력과 경쟁의 쳇바퀴를 탔으며, 동아시아 마을 공동체의 협력 기제인 '표준화'를 생산공정과 관료제에 도입하여 '기민'하고 '긴밀'하게 작동하는 동아시아 기업 조직을 만들어냈습니다.
연공제는 같은 입사 연차를 공유하는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 의식을 높였고, 생산성이 집단적으로 향상되는 데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왜 같이 일해놓고 나이 많다고 더 가져가'라는 불만은, '너도 기다리면 나처럼 보상받아'라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덮였습니다. 이렇게 '지연된 보상'은 나이 많은 '충분히 기다린 세대'로부터 '아직 기다릴 날이 20년, 30년 남은 세대'에게 강요되었습니다. 연공제는 어찌 보면 기다리고자 하는 자, 혹은 기다릴 수 있는 자들(정규직)끼리의 '공모'입니다.
이토록 불안정한 신뢰 위에 연공제가 단단하게 작동하는 이유는 벼농사 체제를 몸에 새기고 있는 농민 출신 노동자들의 '비교와 질투'의 문화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몇몇 대기업들이 직무급제를 도입하려 했지만 같은 연차와 나이의 노동자들이 서로 다른 임금을 받는 것에 대한 불만이 위험수준으로 올라 결국 철회하고 연공제로 돌아갔습니다. 이를 계기로 벼농사 체제의 생산과 소유 시스템 가운데 생산 시스템에서의 공정성이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누가 무슨 일을 얼마만큼 하건 덜하건, 다 똑같이 받는 시스템이 자리잡은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기업들은 국가의 관료제로부터 보상의 원리를 이식하여 이들에게 '자리'로 보상을 했습니다. 더 빠른 승진을 통해 더 높은 연봉과 더 큰 권력을 부여한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직급에서 동일한 보상을 받는 연공제는 개별적인 능력이나 성과에 따른 보상을 위해 직급을 점점 더 잘게 쪼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수많은 '차장 대우'와 같은 직급들이 이렇게 생겨났습니다.
결국 연공제는 숙련과 직무를 평가하는 시스템 개발을 게을리한 동아시아 기업 조직에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뛰어난 인력들은 개인의 능력에 적절히 보상하는 외국 기업으로 이직합니다. 그 다음으로 뛰어난 자들은 적당한 업무 능력과 정치력으로 수뇌부의 간택을 받아 위로 올라갑니다. 그만큼 뛰어나지만 굽신거리기 싫어 고개를 빳빳이 세운 이들은 조직 내부에서 보상을 해주지 않자 조직 바깥으로 뛰쳐나갑니다. 또한 그만큼 뛰어나지만 뻔뻔하지도 고개를 세우지도 않은 인력들은 '해태'로 대응하기 시작합니다. 하건 안 하건 더 하건 덜 하건 똑같이 보상받는 상황에서 '해태'는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이 모든 이탈과 간택과 해태의 끝은 조직의 비효율입니다. 이러한 조직 문화를 가진 기업은 동아시아에서는 통할지언정 세계시장에서는 어느 단계 위로 올라설 수가 없습니다. 개인이 조직에 기여하는 만큼 보상하는 기제가 턱없이 부족한 탓입니다. 따라서 연공제는 위계에 따른 공동 노력과 동원력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에는 조직의 성장에 기여했지만, 생산성이 어느 순간 정점에 이른 후에는 조직의 발목을 잡습니다.
한국과 일본 기업의 임금구조의 기본 틀은 연공제입니다. 서구의 기업들과 달리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근속연수에 따라 표준화된 임금 테이블을 기반으로, 같은 입사 세대는 동일한 수준의 초봉과 임금상승률을 공유하는 '연공제'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한국기업 중 90%는 연공제적 요소가 임금 테이블에 깔려 있고, 60% 이상이 연공제를 주요 임금제도로 운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연공제를 꾸준히 개혁하여 과도한 연공성을 낮추어온 것을 고려하면 한국은 세계 유일의 연공제 국가입니다.
이제 한국은 기업 내 노동자의 연령변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동이 인건비 증가를 초래하고 있고, 더 나아가 비용 위기에 직면한 기업이 비정규직 사용을 늘리고 청년 고용은 줄어듭니다. 저자는 '세대 네트워크 + 연공제 ⇒ 임금 테이블 기울기 변화 ⇒ 인구구조 변동으로 인한 기업의 비용 상승 압력 ⇒ 비정규직 증대 및 청년 고용 축소'라는 연쇄적인 인과 고리의 가설이 개별 기업 단위에서 하나의 '메커니즘'으로 실제로 작동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세대 내 불평등과 세대 간 불평등은 모두 이 연공제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연공제로 인해 세대 간, 연령 간 불평등이 만들어지고, 이것을 향유할 수 있는 정규직과 그렇지 못한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정규직화를 위한 핵심 요구 사항은 연공제의 적용입니다. 젊은 청년들은 연공제 혜택으로 안정적인 임금상승을 60세 혹은 65세까지 누릴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에 20대를 소비합니다. 이쯤 되면 연공제 공화국이라 부를 만합니다.
동아시아인들이 발전시킨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축은 서로 간섭해야 서로가 사는, 협업과 조율 시스템입니다. 우리는, 동아시아인은 오랜 세월 동안 이 협업 시스템을 발전시켜왔고, 근대화 과정에서 이 시스템을 공장으로, 사무실로 이식시켰습니다. 부장님의 사사건건한 간섭에 숨이 막히는 경험,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뿐 아니라 직장에서도 '간섭 권력'이 작동하는 곳이 동아시아 사회입니다.
동아시아는 개인주의자가 남 신경 안 쓰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자유롭게 살기에 이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서로가 촘촘하게 엮여 타인의 생각과 행동을 지켜보고 감시하며 베끼고 잔소리하고 보폭을 맞춰가면서 서로 엇비슷해져가는 사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조율의 기예'는 수천, 적어도 수백 년 동안 마을 단위로 경영해온 공동노동 시스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동아시아 기업에서 ‘간섭 권력’은 단순한 상사의 습관이 아니라, 사회적 조율 시스템의 잔재입니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조직풍토의 개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불황과 생산성 저하 경향의 근저에는 연공제의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공동노동 조직의 제도적 뼈대들인 기술 튜닝과 연공제를 현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제도에 걸맞게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공제의 경우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은 모두 어떤 형태로든 개혁했고 우리만 더 강화된 형태로 지금껏 고수하고 있습니다.
개혁은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절박한 필요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벼농사 체제의 유산들 또한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이루는 개인들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고 봅니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이 오래된 구조가 재구조화하도록 유인해야 합니다. 벼농사에서 시작된 협업과 위계의 문화적 DNA를 21세기에 맞게 재설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쌀, 재난, 국가』가 던지는 화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