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김부장 이야기’가 막을 내렸습니다. 임원 승진을 코앞에 둔 김 부장이 겪는 인생의 소용돌이가 수많은 직장인의 불안한 내면을 건드린 탓인지, 종영 후에도 여운이 깊습니다.(리워크팀은 한국 기업의 '임원'은 통상적으로 보드 멤버(Board Member)가 아니기에 '경영리더'라는 표현을 권장하지만, 본 글에서는 드라마 인용 및 일반적인 용례를 따라 '임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특히 마지막 화에서 김 부장의 경쟁자였던 도진우 부장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임원 승진에서 탈락한 그는 술에 취해 김 부장을 찾아와 묻습니다. "내가 왜 떨어진 것 같냐"고 말이죠. 매년 연말, 언론에 보도되는 대기업 임원 승진 명단을 보며 '인사 관리가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탓일까요? 저에게는 그 장면이 단순한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아픈 자화상처럼 다가왔습니다.
국내 100대 기업에서 일반 직원이 임원으로 승진할 확률은 약 0.8%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20년 넘게 그 좁은 문 하나만을 바라보며 수많은 직장인이 달려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숨이 가빠옵니다. 승진에 대한 인사관리 관행에는 우리 사회가 가진 인사관리의 어두운 그림자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오늘은 승진에 과도하게 집중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과 그 대안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흔히 야구팀에서 선수가 코치가 되면 역할이 바뀌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업에서는 팀원이 팀장이 되면 마치 신분이 상승한 것처럼 인식하곤 합니다. 이는 구성원이 오로지 위만 바라보며 일하게끔 설계된 인사제도의 영향이 큽니다.
승진은 조직 내에서 수행해야 할 역할과 책임(R&R)이 달라지는 것, 즉 '역할의 변화'여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승진이 조직내에서 성공의 유일한 척도이자 신분 상승의 사다리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보상' 구조에 있습니다. 호봉제든 페이밴드(Pay-band)제든, 승진을 하면 기본급이 급격하게 오르도록 설계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승진의 본질인 '새로운 역할에 맞는 적임자 선발'의 의미는 퇴색되고, ‘차등적 보상'을 위한 이벤트로 인식되는 것이죠.
이 때문에 구성원은 자연스럽게 승진에 과몰입하게 되고, 인사부서나 조직장은 구성원들이 승진에 관심을 갖는 심리를 인사관리 측면에서 역이용하기도 합니다. 마치 승진만이 구성원을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나 당연하게도 이는 인사관리 본연의 목적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와 더불어 직급을 본래 개념인 ‘일의 크기’가 아닌 신분, 호칭, 서열의 개념과 유사하게 운영하고 있는 조직이라면 승진만이 조직생활의 목적이 되고 승진 하지 못하면 조직생활을 실패한 사람처럼 인식될 거라는 불안을 야기하게 됩니다.
승진에 대한 과몰입은 조직 운영에 다양한 부작용을 낳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폐해는 리더십의 왜곡입니다. 승진이 지상 과제가 되면, 조직장은 전략을 중심으로 구성원을 통합하고 성과 창출을 돕는 '서번트'가 되기보다, 세세한 업무 지시와 감독에 초점을 맞추는 '마이크로 매니저'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직 전체의 성과를 오로지 조직장 개인의 성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구성원 하나하나의 성과에 대한 책임이 모두 조직장인 자신에게 있다고 믿게 되며, 이는 구성원의 직무 오너십(Ownership)을 약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어차피 성과는 부서장님 몫"이라는 냉소 속에서 자율성은 사라지게 됩니다.
승진만이 유일한 동기부여 수단으로 인식되지 않으려면 몇 가지 '헤징(Hedging) 전략'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보상 구조의 변화입니다.
물론 승진하면 기대기여도가 커지므로 기본급 상승의 기회가 열리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승진 즉시 급격한 기본급 상승이 이루어지는 구조는 승진을 보상 이벤트로 고착화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즉각적인 기본급수준의 변화가 아닌, 새로운 페이밴드에서 더 높은 인상률을 적용받을 '가능성'을 열어주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승진이 곧 '보상'이 아니라, 새로운 '선발'이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는 이처럼 제도의 디테일한 변화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 헤징 포인트는 성과평가의 혁신입니다. 여전히 많은 조직에서 인사평가는 성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일을 잘한다"는 식의 인상 비평에 머무는 경향이 있습니다.
평가 기준이 모호하면 구성원은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인사권을 가진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충성 경쟁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조직의 미션을 실현하기 위한 문제해결과 무관한 행동을 강화시킵니다.
이제는 평가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구성원이 어떤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리고 그 솔루션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눈에 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치있는 문제를 해결하며 느끼는 '효능감'과 '성장'이 진짜 동기부여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헤징 포인트는 직무와 직급의 변경 사유를 기록하고, 훗날 이를 냉정하게 회고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직급을 ‘일의 크기’라고 정의해도, 현장에는 여전히 "이 친구도 오래 고생했으니 챙겨줘야지" 하는 식의 사람 중심 관행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근속연수가 찬 구성원을 승진시키기 위해 억지로 업무를 쪼개거나 덧붙이는, 이른바 '위인설관(사람을 위해 벼슬을 만듦)'식의 직무 재설계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조직장은 단순히 "누가 승진 대상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조직 차원에서 왜 직무재설계가 필요한가"를 먼저 정의해야 합니다. 특히 승진이 발생해야 하는 경우라면, 인사결정을 하기 전에, 조직장은 반드시 다음 4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1) 배경/근거 (Why): 조직차원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
2) 방향 (Strategy):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 무엇인가?
3) 연계 (Align):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구조를 세팅하기 위해서 어떠한 직무/직급 변경이 필요한가?
4) 향후 회고 포인트 (Retrospective): 향후 조직차원의 문제가 효과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이 기록은 단순한 요식행위가 아닙니다. 일정 시간이 흐른 뒤, 당시 작성했던 내용을 꺼내어 직무/직급 변경과 인선이 적절했는지를 되짚어보는 '회고의 기준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직무/직급 변경을 통해 그 사람을 승진시킨 덕분에 우리가 의도했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 조직의 인사관리는 '감'과 '관행'에서 벗어나 전사 차원의 합리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드라마 ‘김 부장 이야기’를 보고, 주변과 소감을 나누며 느낀 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고도성장기 산업사회의 막바지를 지나며 집단적인 회한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위만 바라보며 달려왔지만, 정작 그 끝에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 같다는 공허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사관리의 관행은 한국 사회 전반에도 깊게 스며들어 있습니다. SNS에 떠도는 자동차, 아파트, 소위 명품 계급도가 마치 인생의 정답인 양 합리화하는 문화와도 이제는 작별해야 할 시간입니다. 조직 안에서 누구든 자신이 맡은 역할 안에서 잠재력을 발휘하고, 충분한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승진만 바라보며 일하는 시스템에서는 승진하지 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승진한 사람조차 결국 시스템의 소모품이 될 뿐입니다. 승진만이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서 조직에 기여하기 위한 성과를 창출하고, 그 과정에서 의미와 재미를 느끼는 경험이 동기부여가 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