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방촌 독거노인의 초라한 주방이었다. 연말 불우이웃 돕기 ,, 뻔한 이야기라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번쩍.. 높이 올라간 날카로운 식칼이 손바닥 위에 놓인 반조각 두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착착 자른다. 낡아 녹슨 가스레인지 위에는 일인용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중이다. 손바닥까지 닿았다가 상처 하나 없이 다시 올라가는 칼질이 신기하고 그 두부조각들이 튀지도 않고 국물에 조용히 낙하하고 있는 것도 대단하다. 그걸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티브이 화면은 금방 사랑의 열매로 바뀌었다.
기차역휴게실에서 잠깐 스친 티브이 영상. 다시 보려고 검색작업에 들어갔으나 끝내 찾지 못한..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분.. 숨은 꽃... 아주 잠깐씩 먹다 남은 마지막 두부 반모 화면 속 인물처럼 메인 화면 뒷 배경.. 그냥 스쳐가는 인물로... 비범한.. 그러나 평범하게 보이는 노후인생.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유명한 일본독서광이자 책 수집가며 집필가 공간이다. 나도 책에 대해서는 저분 못지않게 한 오타쿠 했었다. 왜 그렇게 책에 집착했을까? 저분의 책에 대한 집착은 지적인 좀 더 나은 사회진화를 위한 인문학적 탐구가 책이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 들어 솔직해지니 알겠다. 내 책 읽기는 우리 할머니들이 오래오래 입에 넣고 좀 더 달콤함을 즐기려던 박하사탕이었다. 일상의 노동도 못하게 망가진 몸, 견디어내야 할 노후시간을 잠시 달콤한 당으로 충전하며 비루함, 지루함을 잊으려 하신 할머니들. 나도 키 작고 못생기고 별 볼 일 없는 내 존재가 잠시 키다리아저씨의 사랑을 받는 총명한 소녀로 존재할 수 있는 달콤한 시간들로 피난 갈 수 있어서 책에 몰두했던 것이다. 일상이 초라할수록 그 꿈은 더 거대해져 급기야 책 중독현상. 책 읽을 시간이 없으면 책이미지로라도 충전하려고 카톡 대문에 이미지를 걸어 놓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가장 오래 많이 카톡대문에 걸린 이미지가 저 책 이미지다. 20만 권 소장의 저분에 비하면 택도 없지만.. 그리고 책 수준도 저분과는 달리 선데이 서울부터 주역까지 완전 잡식성이지만 나도 저분 못지않게 책이 많았고 많이 읽었다. 그러나 책이 내 거주공간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순간 책이 무서워졌다. 내가 책을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책이 내 인생을 컨트롤하는 기분이랄까.. 그래서 책을 버리고 정리해서 내가 감당할 정도의 분량만 남겨놓았다. 정리하다 보니 저분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많은 책들에 압도당하지 않고 압도하는...
이년 전에 세상을 떠난 저분의 책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분이 모아놓은 이십만 권 고양이 빌딩은 그의 살아 생전처럼 유지될까. 내 책정리 이야기를 쓰려니 문득 궁금해진다.
아무튼 내 노후의 책정리는 딱 세 가지다.
1. 버리고 기록하다
이미 읽은 책은 다 버렸다. 내 인생책들로 남과 공유하고 싶은 책은 브런치 북에 남겼다
2. 헐렁헐렁하게 남겨놓다
내가 최애 하는 제주도 포도호텔 로비의 작고 클래식한 서재다. 내가 감당하기에 적당한 규모의 서재다
. 마지막 진짜 내 노후 주거지로 옮기면 만들고 싶은 서재다. 내가 남겨놓은 책들이 저 이미지에 들어가기에 딱 맞는 양이다. 영혼에도 발효가 있다면 왠지 내 영혼이 발효된 후에나 이해가 될 것 같은 책들이 있다. 사놓기는 했지만 내 발효를 기다리느라 읽다 덮고 읽다 덮고 한 책.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그리스로마신화, 주역, 사주첩경,..... 주로 고전이라 일컫는 책과 내 마지막
놀이 찻잔에 대한 책들이다. 나중에.. 나중에.. 미루다 서재 인테리어 용도로 더 많이 애용된... 그런 책들. 이제 노후가 되었으니 한 장 한 장 천천히 읽어야 할 책들. 그 책들을 저 책장에 옮기면 딱 삼단, 저만큼의 서가 높이와, 서가를 빽빽이 다 채우지 않고 헐렁헐렁하게 저 정도 여백을 두면 딱 맞을 거 같다. 서가 옆에는 책들을 빼서 편한 자세로 읽기에 적당한 약간은 무게감이 있고 유행에 초연한 클래식한 테이블과 소파도 있는 서재.
내 브런치 글들이 책 한 권으로 되어 맨 마지막 줄 맨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꿈을 꾸면서..
3. 저장하다
애지중지 귀한 내 인생 망가질 까봐 미리 앞서가서 성공한 인생이 짜 준 플랜이 적힌 책을 읽고 충실히 따랐고, 격조 있게 당충전 시켜주었던 판타지 상상력들이 있던 책들을 읽어 왔으나
노후에는 더 이상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기로 했다.
인생을 살기도 전에 인생에 대한 남의 책을 너무 많이 읽다 보니 정작 내가 사는 현실은 늘 바람 빠진 풍선이었다. 막상 진짜 몸이 짐이 된다는 그 깊은 의미를 절절하게 깨닫는 노후의 시작에서 생각해 보니 이
죽음에 이르는 이 길은 남이 대신해 줄 수도 없는 내가 정직하고 용기 있게 부딪혀야 하는 일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남의 이야기를 읽기보다 내가 써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는 길을 내 시선으로 내가 중심이 되어 써간다.
다 써버리고 마지막 남은 두부 반모라도 유명브랜드 칼이 아닌 평범한 식도라도 검객처럼
진심을 다하여 내 식대로 잘라 세상에서 가장 나다운 찌개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쓴다는 것은 소통이다. 그리고 물론 이 소통에는 새 책이 필요하다. 내가 쓰는데 참고자료가 될
.. 이전과 달라진 것은 내가 주체라는 것이다.
이후의 책은 책 쓸 때 자료로 쓰기 위해 저장한다.
독서하기에 편한 아이패드가 내 요즘 서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