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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대생의 심야서재 Oct 17. 2024

팥빙수 2/2

아웃 오브 마이 라이프

9.

5시다! 5시가 되면 도서관에서 짐을 챙긴다. 대출할 책들을 백팩에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퇴근 준비를 한다. 내 주머니 속엔 8천 원이 남아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늦었다. 평소보다 도서관에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변칙적인 상황을 기피하는 편이다. 항상 이런 날이면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카페에 들렀다. 어떤 남자가 기분 좋은 얼굴로 카페를 막 나서고 있었다. 카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고 8천 원을 꺼내는데, 카페 점원의 불안한 눈길이 느껴진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그의 표정이 어둡다.


“죄송해요. 팥빙수가 오늘 완판 됐어요. 오늘따라 이상하네요. 팥빙수 찾는 사람이 참 많네요. 마지막 남은 팥빙수는 방금 나간 남자분이 포장해 가셨어요. 조금만 일찍 오시지…”

“네? 팥빙수가 다 팔렸다고요? 이런…”


점원에게는 팥빙수가 팔리면 그만이다. 나는 팥빙수를 예약한 적도 없고, 그저 무심히 들어가 주문해 창가에 앉아 팥이든 얼음이든 그 조화를 즐기면 되는 일이었다. 


“다른 거라도 드릴까요? 요즘 파르페도 괜찮아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카페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 남자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 남자를 찾아서 무엇하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허무하게 관망하는 게 전부가 아닌가.


10.

다음 날은 조금 무력했다. 전날 팥빙수를 뺏겼다는 사실이 마음을 축 처지게 만든 것 같았다. 마치 소중한 레고 블록을 조카에게 빼앗긴 시림처럼, 내 소유를 누군가에게 억지로 빼앗긴 기분이었다. 무력한 채로 도서관에 도착한 이후 줄곧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머릿속엔 오직 팥빙수뿐, 내 것이 아닌 누군가의 위장 속으로 들어간 팥빙수에 대한 울분만이 맴돌았다. 팥빙수를 잊으려 애쓸수록 그 잔상은 더욱 선명하게 내 시야를 맴돌았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팥빙수가 공기 방울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제 팥빙수에 내 자유까지 빼앗긴 셈이었다. 팥빙수가 없으면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둘러야 했다. 그렇다고 이곳 도서관에서 일과를 보내는 일을 관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나의 규칙, 소설을 쓰기 위한 나만의 리추얼이 아니었던가. 나는 이곳을 부유하는 먼지도, 유령도 아니지만, 이곳에 내가 규정한 질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했다. 나는 그것을 흔들 재주가 없었다. 부정한다는 것, 그것은 나에게 저항한다는 것, 나를 흔들어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다. 나는 소설 한 문장조차 쓰지 못하는 인간이 아닌가.


11.

두려웠다. 어제는 다행히 팥빙수를 지킬 수 있었지만, 오늘도 그럴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왠지 그 남자가 또 들이닥쳐서 내 팥빙수를 강탈해 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팥빙수와 낯선 남자의 얼굴이 잠들 때마다 나타났다. 나는 남자를 증오했다. 그리고 팥빙수라는 음식을 혐오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싸움은 팥빙수를 누가 먹느냐가 아니었다. 


결국 오늘은 우려스러운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필름을 되감듯이 카페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그 남자가 나에게 음흉한 미소를 띠며 재빨리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별안간 등 쪽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뛰어서 카페 내부로 진입하는 순간, 점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죄송해요… 방금 나간 남자분이 오늘도…”


남자는 회색 슬리브 티셔츠와 옅은 하늘색의 데님 진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 위아래로 대충 계산해 봐도 천만 원은 넘을 듯했다. 미우미우로 온몸을 치장한 남자가 팥빙수를 포장해 가다니, 기가 찼다. 나도 모르게 8천 원을 움켜쥔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폐가 주먹 속에서 꼬깃꼬깃 구겨져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마치 내 자존심이 그렇게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더욱 초라해진 마음에 카페를 뛰쳐나가 남자의 자취를 좇았다. 저만치서 희미하게 멀어지는 남자의 등이 보였다. 분주히 바삐 어디론가 걸어가는 모습, 나에겐 아무런 목적도 없었지만, 그의 발걸음에는 무언가 강한 목적성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별안간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땅바닥에 손을 짚고 바보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잃어버린 물건을 하늘에 대고 소리쳐봐야, 온 동네가 ‘여기 미친놈 있다’고 손가락질할 게 뻔하지 않은가. 남자는 점점 멀어져 갔다. 미우미우로 치장한 남자는 회색 횡단보도를 건너 공원 모퉁이를 돌아, 결국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울분이 차올라 몸을 발작적으로 흔들어 보았지만,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세상은 바쁘게 각자의 길을 갈 뿐, 내 울분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그 소리가 귀를 때리는 듯, 쿵쿵거리는 심장소리만이 내 귓가에 메아리쳤다.


12.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백팩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걸쳐놓고 몸을 엎드렸다. 머릿속은 온통 그 남자로 가득 찼다. '대체 그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 왜 하필 내 앞에서, 그 시간에, 마지막 팥빙수를 포장해 갔을까?' 카페 점원에게 화를 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팥과 얼음을 왜 더 준비해두지 않은 거야?' 이런 사소한 궁금증이 폭발할 듯이 쌓였다. 행운은 왜 항상 나를 비껴가는지, 마치 나를 괴롭히기로 작정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전에도 세상이 내 편이었던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일부러 더 늦게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다, 그 남자가 내 팥빙수를 탈취하는 과정을 기다렸다가, 잠복근무하는 형사처럼 갑자기 덮쳐야겠다. 그래서 그 남자의 신분을 밝히고, 내 물건을…


나는 며칠 동안 그 남자 때문에 집에 제시간에 들어가지 못했다. 팥빙수를 빼앗겼다는 분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은 탓도 있었고, 소설 쓰기가 얼마쯤 진행됐냐고 묻는 아내의 은근한 비웃음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팥빙수를 빼앗긴 날부터는 도서관 마감 시간까지 더 버텨보거나, 8천 원을 들고 편의점에 가서 삼각김밥이나 야채김밥 그리고 탄산수 한 병 정도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그렇다고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었다. 소설 쓰기는 여전히 진도가 나지 않았다.


어제는 공원에 앉아서 뭔가 산문이라도 끄적여보고 싶었지만, 굶주림이 가시지 않는 것이었다. 편의점에서 해결한 삼각김밥이나 탄산수 정도로는 팥빙수에 대한 갈망을 멈출 수 없었나 보다.


심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오늘은 흰색 데님 셔츠와 개버딘 팬츠였다. 어김없이 오늘도 미우미우로 치장했다. 그 남자가 카페로 들어선 순간, 나는 카페가 잘 보이는 편의점 파라솔 아래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의자 뒤에 쪼그려 앉아 남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남자는 익숙하고 느긋하게 팥빙수를 주문했다. 점원은 서글서글하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보다 더 반갑게 남자를 반겼다. 무표정하고 딱딱하게 나를 대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내 가슴에서 질투가 불처럼 솟아났다. 남자보다 점원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남자가 카페로 나와 어딘가로 이동하며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낸다.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듯했다.


녀석을 뒤에서 덮쳐, 팥빙수를 빼앗고 프로 권투선수처럼 스트레이트를 날리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치밀었지만, 먼저 녀석의 본거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집착이 더 강했다. 나는 그를 미행하기로 결심했다. 녀석의 발자국 소리가 또각또각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약 50미터의 거리를 두고 천천히 따라갔다. 발소리가 내 심장을 조이는 것만 같았다. 후드티의 모자를 눌러쓰고,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변장을 했다. 긴장감에 숨소리조차 죽이며, 발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영화 속 미행 장면처럼 느껴졌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내 모든 감각이 녀석에게 집중되며,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집착이 온몸을 뒤덮었다.


녀석의 또각또각 경쾌한 발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녀석은 파출소를 지나쳐, 작은 교회를 지났고, 소방서를 지나 빵집을 지났다. 그리고 A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뭔가 석연찮았다. 내가 자주 걸어가는 익숙한 그 길이었던 것이다. 심장이 덜컥 허벅지까지 내려앉을 듯했다. 우연일까? 나와 녀석의 동선이 공교롭게도 일치한 것이었다. 뭐, 같은 동네에 사니, 같은 아파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면 저녁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숨을 죽이고 녀석의 뒤를 밟았다. 오늘 녀석이 향하는 곳까지 반드시 따라간다. 녀석이 어디 사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게 목표다. 그렇지만 왜 그 목표를 선정한 것인지 나 자신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냥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전부였을지도 몰랐다. 그 남자는 A 아파트 101동을 지나쳐 102동 103을 지나갔다. 예의 내가 매일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남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선 곳은 104동이었다! 바로 내가 사는 동으로! 나는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아야 했다.


남자의 기다란 손끝이 인터폰의 숫자들을 침착하게 눌렀다. 멀리에서 어떤 숫자를 누르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가슴이 야단스럽게 요동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이제 일이 벌어질 데까지 벌어진 것 같아서 이 사태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쿵쿵 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남자가 아파트 출입구로 들어서는걸, 구경하다, 녀석이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시점에 나도 출입구 안으로 몰래 들어섰다. 엘리베이터는 마침 올라가는 중이었다. 4, 5, 8, 12, … 15!


엘리베이터는 정확하게 15층에 멈춰 섰다. 멈춰 서더니 시간도 공간도 나조차 얼음이라도 된 듯 꼼짝하지 않았다. 숫자는 여전히 빨간빛으로 15를 증명하고 있었다. 15층에는 두 개의 문이 존재한다. 나와 아내가 사는 1501호, 괴팍한 노인네가 사는 1502호! 답은 이미 결정된 듯했다. 대담한 사건이 벌어졌다. 남편이 엄연히 살아있는데, 비록 허수아비 같은 신세가 되어서 도서관에서 매일 시간이나 허비하는 신세지만, 그래도 남편이 여기에 있는데, 남자를 불러대다니.


당장 뛰어 올라가서 저 둘을 끝장내는 게 맞는 걸까? 현장을 덮쳐야 내가 할 일을 다하는 걸까? 그러면? 현장에서 아내의 불륜, 그것도 내 안방에서 다른 남자와 엉겨 붙은 아내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아파트 앞 작은 공원에 주저앉아 오랫동안 고민했다. 1501호의 거실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 거실에서, 아니 아내의 침대 위에서 남녀는 서로의 몸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한때 나에게 속했던, 나의 분신이나 다름없던 여자의 주인은 이제 내가 아니라 그 남자였다. 미우미우로 몸을 치장한 그 남자!


나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통제불능이었다. 나는 간질환자처럼 온몸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몸의 모든 땀구멍이 다른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는 듯했다. 벤치에 앉아 15층을 한 번 바라보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눈앞에 보기 좋게 가지치기된 관목을 비현실적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시선을 위아래로 교차하며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내가 돌아갈 곳이 내일도 남아있을지 생각했다.


그래도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남자는 1501호가 아닌 1502호로 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괴팍한 노인네는 죽어버렸거나, 남몰래 이사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 그 남자는 1501호가 아니라 1502에 사는 것이다! 모든 게 나의 피해의식이 만들어낸 재미없는 불륜 드라마일 뿐이었다.


나는 진격하는 군인처럼 엘리베이터에 올라 15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15층에 도착해서 초인종을 눌렀다. 한 3초쯤 기다렸을까, 아니면 5초였을까, 잠시의 농밀한 정적이 복도에 흘렀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아내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도 뭔가 실망하거나, 다소 결연한 자세처럼 나를 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들어와”


‘들어와? 여기가 내 집이 아닌가? 손님을 대하는 듯한 저 자세는 뭐지?’ 순간 나는 다시 의심에 빠져들었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어 환한 조명이 비치는 거실에 들어섰다. 그 순간 발밑에 미우미우 스니커즈가 하나 보였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얼어붙고 있었다.


숨이 콱 막혔다. 절대 들어서지 말아야 할 악마의 본진으로 들어서는 기분이 들었다. 끔찍했고 역겨웠다. 이 상황이 어떤 드라마로 펼쳐질지는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됐다. 예상대로 식탁 앞에서 녀석이 어색하게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와 녀석이 함께 앉아있었던 게 분명했다. 아내는 난처해하지도 죄인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닥칠 일이 일어났을 뿐이라고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잠깐 앉아봐” 아내가 말했다.


“당신한테는 정말 미안한데… 사실 나 이 남자와 오래전부터 사귀고 있었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제는 숨길 수가 없어. 아주 능력 있는 남자야. 솔직히 우리 사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이나 해? 서로에게 정은 이미 다 떨어졌고, 그저 한 집에 살고 있는 남남일 뿐이었잖아. 각자 더 나은 삶을 위해 갈라서는 게 맞지 않아? 당신은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여기서 계속 쓰면 돼. 생활비는 이 사람이 보태줄 거야. 이 사람, 나한테 꽤 잘해주고 능력도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게 서로에게 더 좋은 거야.”


녀석을 다시 바라봤다. 녀석이 앉았던 의자 앞 테이블 위엔 팥빙수가 있었다. 팥빙수! 내가 늘 퇴근할 때마다 안식이 되어주던 그 팥빙수. 팥빙수 위엔 놋쇠 숟가락이 두 개 꽂혀 있었다. 아내와 녀석이 웃으며 팥빙수를 들이켰을 게 뻔했다. 나는 그 한 장의 그림으로 과거의 현재, 그리고 닥쳐올 미래를 예상할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두 사람을 잠시 쳐다봤다. 그리고 내 방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곤 문을 닫았다. 그리곤 나만의 세계로, 나만의 몽상의 세계로 깊숙이 진입했다.




그래, 이 일기장은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남자가 남긴 기록의 대부분은 도서관에서 보낸 하루의 짧은 기록과 팥빙수, 그리고 그의 아내의 외도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중단됐다. 남자는 서글프지만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살인 보고서라는 것은 치정에 얽힌 두 남녀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태연하게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것일까.


나는 노트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남자에게 노트를 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남자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더 자세한 내막과 이후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작가의 본능으로서 남자에게 접근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날도 그다음 날도 한 달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심지어 남자가 자주 들른 카페에 찾아가서 남자의 행방을 물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남자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살인 보고서, 그 제목에 담긴 숨은 이야기는 앞으로도 밝혀내지 못하리라. 남은 이야기, 이야기의 결말은 나에게 주어진 과제일까. 나는 카페에 다시 찾아가서 남자가 늘 주문했던 팥빙수를 주문했다. 그리고 창가 앞자리에 앉아 놋쇠로 만든 작은 숟가락으로 팥빙수를 슬쩍 떠먹어봤다. 시원한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팥빙수를 뜬 숟가락을 서늘하게 띄웠다.


나는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남자가 늘 먹던 팥빙수를 계속 떠먹었다. 얼음이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동안, 머릿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달콤함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맛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옛 감정이 되살아나고 그것이 또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뭔가를 깨우려는 것 같았다. 팥빙수를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을 때마다, 낯익은 기억이 내 안에 겹쳐지고, 나는 점점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갔다. 그의 체념, 그의 울분, 그의 상실감이 내 안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살인 보고서의 마침표를 찍는 일은 이제 내 몫이 되었다. 내 몫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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