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출발 지점을 향해 자동차로 이동하는 내내 비가 내렸다. 호주의 겨울인 7월 하순, 아직 어두컴컴한 아침 6시의 공기가 비로 인해 축축했다. 다행히 6시 반쯤 날이 밝아오며 비가 멈추었다. 출발선 앞에서 대회 관계자가 50km 코스와 헷갈리면 안 되니까 꼭 오렌지색 리본을 따라가라고 세 번씩이나 당부했다. 내 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앞의 러너들이 힘찬 함성과 함께 우르르 뛰어나갔다. 나도 아들의 따뜻한 응원을 받으며 첫 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들려오는 러너들 간의 대화 소리와 길 옆의 새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달렸다. 서로 한마디 말이 없어도 함께 뛴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었다. 숨이 차서 그런 건지, 날씨가 추워서 그런 건지 기침 소리를 내는 러너들도 적지 않았다. 그 기침소리마저도 반가웠다. 나 혼자 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함께 뛰는 거다. 동료 러너, 가족, 친구 그리고 자연과 함께.
대회 출발 전에 내린 비로 인해 길이 미끄러웠다. 왼발로 돌을 밟고 오르막을 오르려다가 훅 미끄러졌다. 거의 넘어지기 직전까지 갔다. 다치지 않아 감사하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한참을 뛰었다. 이번에는 오른발로 길 위에 불쑥 나와 있는 단단한 나무뿌리를 걷어찼다. 둘째, 셋째, 넷째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졌다. 특히 장거리 연습하면서 발톱이 까맣게 변한 넷째 발가락은 조금 과장한다면, 마치 보신각 종이 당목에 부딪힐 때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뛰다 보니 다행히 조금씩 감각이 돌아왔다. 또 한 번은 박혀 있는 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세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지나간 걸 보니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인 모양이다.
데이비드슨 공원(Davidson Park)으로 향하는 구간은 바다가 육지 쪽으로 길게 들어와 있는 해만을 따라 이루어져 있다. 아침의 에메랄드빛 바다를 끼고 달리는 내내 이 생각이 들었다. '참~ 좋다'
2주마다 함께 산행을 하는 성당 교우분들과 데이비드슨 공원에 있는 에이드 스테이션에서 9시 15분에서 30분 사이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9시 10분이었다. 내리막길이 많았고 컨디션이 좋아서 예상보다 일찍 도착했다. 물을 채우고 주머니에 있던 넛바를 꺼내 먹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오지 않으신 것 같아 전화를 했다. 이미 도착해서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아마도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아내도 함께 왔는데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100미터쯤 달렸을까? 대회 코스 표시가 공원 내 도로에서 바로 옆 좁은 산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와 성당 교우분들이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남북 이산가족이 몇십 년 만에 상봉하는 듯하게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환한 웃음을 짓고 사진을 찍었다. 서로 1분만 엇갈렸어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기적이 일어났다. 여러 분들의 따뜻한 미소와 화이팅에 힘이 솟아났다.
4시간을 넘게 뛰었다. 몸이 지치기 시작했다. 맨리 댐(Manly Dam)을 지난 후 조금만 가면 다시 에이드 스테이션에서 쉴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대회 전에 지도에서 확인한 스테이션 위치는 바로 약 50m 앞이었다. 그런데 웬걸. 오렌지색 리본은 바로 앞이 아닌 산으로 올라가라고 가리켰다.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올랐다. 올라가고 또 올라가도 끊임없이 급한 오르막이 이어졌다. 500미터는 넘게 올라간 듯했다. 이어지는 평지길과 내리막길까지 20분 넘게 걸렸다. 바로 코앞이라는 기대가 내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길에 대한 기대, 사람에 대한 기대, 앞일에 대한 기대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
마침내 맨리댐 에이드 스테이션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러닝 베스트에서 전날 딸이 사다 준 콩가루 인절미 팩을 꺼냈다. 등에 매고 거의 5시간을 뛰었더니 콩가루 인절미가 누드 인절미로 바뀌었다. 콩가루는 사이좋게 아래쪽에 한 몸으로 뭉쳐 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인절미를 언제 먹었던가? 5시간 달리기의 특별한 조리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