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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유진 Jun 16. 2018

9년을 이어진 단 하루의 마법

비포 선셋 (2004)

*전작 결말 포함*


이제는 비포 선셋을 봐야겠다고, 비포 선라이즈의 촬영지였던 빈에서 생각했다.


빈에는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고, 저녁에 마지막으로 간 미술관이 알베르티나였다. 알베르티나에서 바라보는 빈의 야경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영화 속 장면을 나란히 두고 바라보았을 때 어쩐지 더욱 감상적이었다. 그곳에 혼자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런 기분에 불을 지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기분들이 점차 잦아들면서 이제 이만큼 있었으면 됐다는 생각이 들 때,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로 발을 옮겼다.


우연하게도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크인과 동시에 영화광인 한 남자를 만났다. 챔피언스리그 중계로 북적거리는 라운지에서, 이국에서 보니 왠지 더 반가운 손흥민이 여행자들의 머리 위를 누비고 있을 때, 구석진 어느 자리에서 그와 나는 맥주를 쥐고 꼭 봐야 할 명작들에 대해서 떠들었다. 둘 다 명작이라고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비포 선라이즈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는 자기가 이제는 비포 선라이즈보다 비포 선셋의 나이에 더 가까워져 버렸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서 새삼 나도 내가 그 나이, 제시와 함께 빈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셀린의 나이에서 제법 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비포 선셋을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비포 선셋에서, 전작의 열린 결말이었던 제시와 셀린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두 사람은 열차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반년 뒤에 다시 빈에서 만나자는 약속만 남긴 채 연락처도 없이 작별했었다. 속편인 비포 선셋에서, 그들은 무려 9년이 지나고 나서야 파리에서 재회한다. 약속이 깨져 셀린을 만나지 못한 제시가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썼는데 그게 베스트셀러가 되어버려서다. 셀린은 그 책을 읽고 파리에서 열린 제시의 사인회에 나타나 그를 깜짝 놀라게 한다.


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는, 비포 선셋에서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나를 매료시켰다. 특별한 줄거리 없이, 현실의 시간에 가깝게 흘러가는 영화의 시간, 진짜 같은 대사와 연기, 그리고 무한정 주어지지 않은 그들의 시간.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인공들이 좀 더 사연 많은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Memories are wonderful things, if you don't have to deal with the past.

9년 전처럼 거리를 거닐며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이야기하는 그들에게, 9년 전의 그날만큼 강렬했던 날은 없었다. 셀린에게는 그때와 같은 로맨스가 없었고, 제시의 결혼 생활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 모든 안부가, 어쩐지 조금은 작위적으로 들렸다. 둘 다 서로에게 잘 지낸 척을 해야 할지 못 지낸 척을 해야 할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았다. 해서는 안 될 이야기인 줄 알면서도 이제는 열정적이지 않은 연애, 사랑이 없는 결혼, 슬픈 현실에 대해서 고백하고,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어른들이 되어서는 서로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고 위로의 말을 주고받는다. 붙잡고 싶어서다. 지금까지의 생활로 만족스럽다면 눈앞의 상대를 붙잡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서로에게 이끌리고 맴도는 과정은 어색하지는 않지만 퍽 자연스럽지도 않았다. 그 부자연스러운 대화가 뜨겁게 흘러가게 해준 건 오직 그 감정의 온도였다. 사실 그걸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제시와 셀린의 뜨거운 재회를 조금은 냉소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을 이어주는 끈이 사실 9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루의 추억이기 때문이다. 비포 선셋에서는 지난 시간 그들이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했으며 또 그날이 각자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드러나는데, 사실 그들이 실제로 함께한 시간은 단 하루에 불과하다. 제시가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셀린이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 하루의 여운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저 놓쳐버린 것에 대한 열망과 행복하지 않은 현실이 서로에 대한 환상을 더 키웠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런 냉소는 사실 우연의 마법을 좇다가 상처받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빈에 가게 된 이유는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또 다른 우연 덕분이었다. 부다페스트의 성곽에서 나는 어쩌다 그리스에서 온 여행객들을 만나 함께 어울리게 되었는데, 그들이 내게 하루 정도는 빈에 다녀오라고 강력하게 추천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여행지에서 겪는 우연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그 어떤 맛있는 음식이나 멋진 풍경을 앞서는 추억이 되고, 간혹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다시 만나고 싶은 인연이 된다. 그 인연이 내 미래에 대한 상상에 거침없이 끼어들게 되었을 때, 나는 기대를 뛰어넘은 사건들에 부여한 의미가 어느덧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조금은 두려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비포 선라이즈, 그리고 비포 선셋을 보게 된 계기도 모두 처음 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였다. 그렇기에 내가 받아들인 우연은 단발성의 사건이 아니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흐름 속에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때로는 붙잡고 슬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전작과 속편 사이에 이야기와 똑같은 9년의 공백이 존재한다는 것, 그래서 그만큼 달라진 배우들의 나이가 꾸밈없이 드러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본에 불과한 로맨스를 어쩐지 진실한 것처럼 대하게 만든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해서, 내게는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바람이, 그리고 나의 바람을 아는 듯 불어오는 우연이, 더욱 영화를 진실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작가의 비포 선라이즈 (1995) 리뷰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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