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다른 집 아이들이 이 질문에 대답할 때 나는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혼자서 고민했다.
"나는 할머니가 더 좋을까 엄마가 더 좋을까?"
나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내가 아기일 때, 엄마가 일하러 가면 할머니는 나를 업고서 시장 구경을 가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신기한 게 많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단다. 옹알이밖에 못하는 내게 할머니는 여러 이야기를 들려줬을 것이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그런 말들을 먹고 나는 무사히 자라났다. 어린이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말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내가 좋아하던 말, "달려 달려!" 집 근처 어두운 굴다리를 함께 지날 때마다 할머니는 그렇게 외쳤다. 나는 할머니의 검지를 꼭 붙잡고서 달려달려, 따라 외쳤다. 우리는 이유 없이 뛰며 깔깔댔고 굴다리 안에 내 목소리가 넓게 울려 퍼지는 게 참 좋았다.
또다시 무럭무럭 자란 나는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 노인네의 말보다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믿는 그런 어른이 되었다. 지금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우리 할머니는 이제 나도 잘 알아보지 못하고 오줌도 못 누고 음식도 못 삼킨다. 나는 가만히 누워있는 할머니에게 매일 이야기한다. 흰 바지를 새로 사서 입고 와 봤는데 어떠냐고, 점심엔 엄마와 계란찜을 먹었다고 조잘조잘 말해준다.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내 말들이 할머니의 어딘가에 가닿을 것을 이상하리만큼 믿게 된다.
열일곱 살 내 생일날, 할머니는 혈관 문제로 한 번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을 가장 처음 발견했던 내가 했던 기도가 생각난다.
하느님 안돼요. 지금은 안돼요. 할머니에게 못된 말만 하고 잘해주지도 못했단 말이에요.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했어요. 아직 안돼요 하느님 제발 이대로는 안돼요 엉엉. (ㅠㅠ)
말을 꽤나 잘하게 된 고등학생이 랩처럼 내뱉은 기도가 닿았는지 다행히 할머니는 그때 곧 괜찮아져서 퇴원도 했다. 신은 내게 10년을 선물로 주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이야기했나.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 할머니를 많이 안아주고 뽀뽀도 많이 하고 예쁘다고 수없이 이야기해주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더 많이 해야 했는데. 내 기억에 차고 넘칠 정도로 했어야 했는데. 10년이나 주어진 것 치고는 별로 안 했나 보다. 꿈에서라도 이야기해야지. 천사처럼 누워있는 할머니가 들으려면 그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머니를 더 좋아할까 엄마를 더 좋아할까. 그네를 타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날이 있었다. 그네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처럼 그 누구에 대한 애정의 부등호는 어린 마음속에서 흔들리기만 해서 헷갈리고 또 헷갈렸다. 그래, 할머니를 나는 더 좋아해,라고 조심스레 결론 내렸던 그 날의 놀이터. 좋아해, 라는 얕은 단어로 쌓아 올렸던,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이른 사랑.
ps. 엄마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