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저니 시대의 Provenance
미술관 수장고에서 일할 때, 나는 작품 한 점을 받아들이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Provenance, 즉 작품의 출처 기록이다. 누가 그렸는가, 최초 소유자는 누구였는가, 어떤 경로로 이 미술관까지 왔는가. 이 선형적 서사는 단순한 이력서가 아니다. 그것은 작품의 진위를 증명하고, 가치를 정당화하며, 때로는 한 시대의 취향과 권력 관계를 드러내는 문서다.
19세기 인상파 작품 하나를 생각해보자. 화가의 아틀리에에서 탄생한 그림은 화상을 거쳐 수집가의 응접실로, 다시 경매장을 통해 미술관으로 이동한다. 각 단계마다 영수증, 전시 카탈로그, 서신이 남는다. 이 서류 더미가 바로 작품의 "족보"이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작품이 "진짜"임을 확신한다.
그런데 미드저니로 생성한 이미지의 출처는 무엇인가?
미드저니에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순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이 거대한 수장고에 접속한다. 수십억 개의 이미지로 학습된 모델. 그 안에는 르네상스 회화부터 인스타그램 셀카까지, 19세기 판화부터 현대 광고 포스터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시각 문화의 총체가 압축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아카이브"가 아니다. 개별 작품들이 분류되고 보존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이미지가 녹아내려 하나의 잠재적 가능성의 바다를 이룬 공간이다. 들뢰즈가 말한 "잠재성(virtuality)"의 영역.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무한한 이미지들이 생성될 수 있는 가능태의 공간.
그렇다면 내가 생성한 이 이미지의 출처는 어디인가?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 수천 명의 사진가들? 그들의 이미지를 스크랩한 인터넷 플랫폼들? 데이터를 정제하고 태그를 단 노동자들? 알고리즘을 설계한 엔지니어들? 프롬프트를 작성한 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중첩?
전통 미술사는 저자성(authorship)을 명확히 하는 학문이었다. "이것은 렘브란트의 작품인가, 제자의 작품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논쟁하고, X-ray로 안료를 분석하고, 붓질의 습관을 연구했다. 단일한 천재 작가의 손길을 확증하는 것이 미술사의 핵심 작업이었다.
하지만 미드저니 이미지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저자성을 가진다. 이것은 **집단 저자성(collective authorship)**이다.
내가 "sunset over ocean, impressionist style"이라고 입력했을 때, 알고리즘이 참조하는 것은:
모네, 터너, 호쿠사이의 석양 묘사
수천 명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찍은 바다 풍경
영화 포스터, 관광 브로슈어, 배경화면에 등장한 석양들
"impressionist"라는 단어에 태그된 모든 시각 데이터
이 모든 것이 통계적으로 평균화되고, 조합되고, 변형되어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로 출력된다. 이 이미지의 "진짜 저자"는 누구인가? 모두이자 아무도 아니다.
큐레이터로서 나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이미지는 어디서 왔는가?"가 아니라, "이 이미지는 무엇과 공명하는가?"
미드저니 이미지를 볼 때, 우리는 종종 기시감(déjà vu)을 느낀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정확히 그렇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봤다. 수백 번, 수천 번. 다만 정확히 이 조합으로는 아니었을 뿐.
미드저니 이미지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집단적 시각 기억을 건드린다. 고전 회화의 구도, 현대 사진의 감각, 영화의 색감, 광고의 세련됨... 이 모든 레퍼런스들이 한 이미지 안에서 동시에 활성화된다.
전통적 provenance가 "이 작품은 렘브란트에게서 왔다"고 말한다면, 미드저니 이미지의 provenance는 "이 이미지는 인류의 시각 문화 전체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20세기 초 다다이스트들의 콜라주는 이미 "출처의 다원화"를 실험했다. 신문 조각, 광고 이미지, 사진을 오려붙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었다. 앤디 워홀은 캠벨 수프 캔과 마릴린 먼로 사진을 전유하며 대중문화 이미지의 "원본"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은 "오리지널리티는 환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드저니는 이를 완전히 다른 스케일로 밀어붙인다. 워홀이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하고 변형했다면, 미드저니는 수십억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참조한다. 콜라주 작가가 잡지에서 이미지를 오려냈다면, 미드저니는 인터넷 전체를 하나의 잡지처럼 다룬다.
우리는 이제 포스트-오리지널(post-original)의 시대에 살고 있다. 원본과 복제의 구분이 무의미해진 것을 넘어, 모든 이미지가 잠재적으로 다른 모든 이미지의 변주가 되는 시대.
그렇다면 큐레이터의 역할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큐레이터는 "진품"을 가짜로부터 구별하고, 중요한 작품을 사소한 것으로부터 선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드저니 시대의 큐레이터는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이미지는 어떤 문화적 레퍼런스들을 활성화하는가?
어떤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는가?
무엇과 대화하고, 무엇에 응답하는가?
어떤 맥락에 배치될 때 의미가 발화하는가?
출처를 추적하는 대신, 관계를 지도화(mapping)해야 한다. 선형적 족보 대신, 그물망 같은 연결망을 그려야 한다.
나는 최근 내 유튜브 채널에 올릴 AI 음악 영상을 위해 미드저니로 수십 장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그 과정은 전시 기획과 놀라울 만큼 유사하다.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선택하고, 배열하고, 서사를 만드는 일. 차이가 있다면, 수장고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알고리즘적 잠재성이라는 점뿐이다.
미드저니 이미지의 provenance는 추적 불가능하다. 아니, 추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단일한 출처로부터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공명(resonance)을 읽어야 한다. 이 이미지가 어떤 시각 문화의 결들과 공명하는지, 어떤 기억의 층위를 진동시키는지, 어떤 감각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지.
미술관이 "이것은 1889년 빈센트 반 고흐가 그렸다"는 명패를 다는 곳이라면, AI 시대의 큐레이션은 "이것은 인상주의와 디지털 미학과 당신의 기억이 만나는 지점이다"라고 말하는 실천이 되어야 한다.
출처는 더 이상 과거로의 선형적 여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다층적 울림이다. 그리고 우리 큐레이터는 그 울림의 건축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