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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어떤 그림 앞에서는 발이 묶일까

상실이 선물한 안목(眼目)에 대하여

by 류임상

미술관의 넓은 홀을 천천히 걷습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적당한 울림을 만들어내는 공간. 우리는 수십 점의 명작을 그저 스치듯 지나칩니다. "색감이 좋네", "이 작가 유명하지"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음 그림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뭐 가끔 '이런것도 작품이군...' 할 때도 있지만요.


그런데 기이한 순간이 찾아옵니다. 어떤 그림 앞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것처럼 발이 저절로 멈춰 서는 순간입니다.

그 그림이 미술관에서 가장 비싼 작품이라서가 아닙니다. 미술 교과서에 실린 유명한 그림이라서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도슨트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그 그림과 나 사이에 팽팽한 침묵만이 흐릅니다.


왜일까요? 왜 하필 그 그림이었을까요? 그건 그 그림이 당신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혹은 당신이 차마 말하지 못한 상처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을 아는 눈: 에드워드 호퍼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봅니다. <뉴욕의 방> 속에는 남녀가 함께 있습니다. 물리적 거리는 가깝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신문에 얼굴을 파묻고 있고, 아내는 멍하니 피아노 건반을 누르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의 시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처럼 어긋나 있습니다.


tempImageAUG2gJ.heic Room in New York, 1932


이 건조한 풍경 앞에서 유독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호퍼의 붓 터치가 훌륭해서 감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 그림 속 흐르는 공기가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도 사무치게 외로웠던 밤, 대화가 툭 끊긴 식탁 위를 감돌던 무거운 침묵,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멀어졌을까" 하고 삼켜야 했던 질문들.


호퍼는 평생 고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뼛속 깊이 겪어낸 고독을 그렸고, 그 고독을 아는 사람들만이 그 그림 속 '빈 공간'을 읽어냅니다. 호퍼를 알아보는 당신의 안목은 미술사 지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당신이 견뎌낸 외로움의 시간에서 온 것입니다.


고통을 직시하는 눈: 프리다 칼로


여기, 자신의 고통을 전시하듯 드러낸 여자가 있습니다.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입니다. 열여덟 살의 버스 사고로 평생 부서진 척추와 쇠약한 몸을 안고 살았던 그녀는, 캔버스 위에서만큼은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온몸에 못이 박힌 모습, 갈라진 척추, 피 흘리는 자화상.


tempImageYHjr4k.heic The Broken Column, 1944


보통의 사람들은 감추고 싶어 할 치부를 그녀는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기괴하고 처절한 그림 앞에서, 누군가는 위로를 받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남들에게는 말 못 할 지병을 앓고 있는 사람, 사고로 인해 예전 같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 혹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어 "아무도 내 고통을 모를 거야"라고 체념했던 사람들입니다.


칼로의 그림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보세요, 나도 이렇게 아팠습니다.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그림을 알아보는 안목은 명작을 많이 봐서 생긴 게 아닙니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전우애 같은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듣는 눈: 마크 로스코


거대한 캔버스를 봅니다. 아무런 형태도 없습니다. 그저 붉은색, 검은색, 주황색의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닙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입니다. "이게 뭐야? 그냥 색칠한 거 아니야?"라고 묻는 사람들 틈에서, 어떤 이는 그 색채 덩어리 앞에서 오열합니다.


tempImagehAZD0n.heic Orange and Yellow, 1956


로스코 앞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진 이들입니다. "뭐가 힘드냐"는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던 사람들, 어떤 위로의 말도 겉돌기만 했던 사람들.


로스코는 형태를 지우고 오직 색(色)이라는 감정의 원형만을 남겼습니다. 말이 필요 없는 슬픔, 언어 이전의 고독. 로스코의 색은 그들의 짓눌린 감정과 정확히 같은 주파수로 공명합니다.


상처는 옹이가 되어 세상을 보는 눈이 된다


우리는 흔히 '안목(眼目)'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지적인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보고, 많이 공부해야 생기는 것이라고요. 하지만 예술 앞에서 우리의 영혼이 반응하는 순간을 되짚어보면, 안목의 정의는 달라져야 합니다.


안목은 학습이 아니라 '자각'입니다.

나의 상처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보는 능력,

그것이 바로 안목의 본질입니다.


외로워 본 사람만이 지하철 차창 밖을 멍하니 응시하는 낯선 타인의 쓸쓸함을 알아챕니다. 아파 본 사람만이 웃고 있는 친구의 얼굴 뒤에 숨겨진 미세한 그늘을 읽어냅니다. 인정받지 못해 몸부림쳐 본 사람만이,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의 노란색이 단순한 색깔이 아니라 "제발 나를 좀 봐달라"는 절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어떤 작품 앞에서 가슴이 뛰거나 눈물이 차오른다면, 스스로를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예술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의 삶이 그만큼 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당신의 상처를 통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곧 당신의 안목입니다


다음에 미술관에 가시거든, 유명한 그림을 찾아다니기보다 당신의 발길이 멈추는 곳을 믿어보세요. 그리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시길 바랍니다.


"이 그림이 나의 어떤 시절을 건드렸는가?"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이 그림 앞에서 멈춰 섰는가?"

예술은 거울입니다. 그 거울은 당신의 가장 아픈 곳을 비추지만, 동시에 말해줍니다. 그 아픔 덕분에 당신의 눈이 열렸다고. 이제 그 눈으로 그림을 보고, 세상을 보고, 타인을 안아주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살아낸 그 치열한 이야기들이 당신의 안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술이, 그리고 당신의 지난 상처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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