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가 흉내 낼 수 없는 ‘감각’과 ‘체험’의 세계
#1 완벽한 묘사, 부재하는 감각
ChatGPT에게 “이별의 아픔”에 대해 써달라고 해봅니다. 문장은 정제되어 있고, 감정의 기복은 능숙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Midjourney에게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를 주문하면, 빗줄기의 각도와 물웅덩이의 반사광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결과물은 때로 인간의 그것보다 더 감상적이고, 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완벽한 결과물에는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습니다.
AI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어떤 문맥에서 어떤 단어들과 결합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수천만 개의 문장 패턴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벽 세시에 잠을 깰 때마다 찾아오는 그 사람의 잔상,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는 손의 떨림, 심장이 실제로 조여드는 듯한 물리적 통증—그런 것들은 모릅니다. ‘비’의 시각적 형태는 완벽하게 재현하지만, 젖은 옷이 피부에 달라붙는 축축한 불쾌감, 빗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의 차가움, 우산 없이 걷다가 포기하는 순간의 체념—그런 것들은 모릅니다.
모든 것을 ‘아는’ 존재와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그 사이에서 예술은 어디에 발을 딛고 있을까요?
#2 텍스트의 감옥 vs 경험의 자유
AI의 지식은 전부 간접 정보입니다. 텍스트, 이미지, 영상—모두 누군가의 경험을 기호화한 2차 자료입니다. 반면 인간의 지식은 직접 체험에서 옵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근본적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AI에게 파리에 대해 물으면, 에펠탑의 높이(324미터), 건축 연도(1889년), 인근 명소까지의 거리를 1초 만에 정리해줍니다. 완벽한 여행 가이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AI는 센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를 모릅니다. 노천카페에서 들리는 프랑스어의 억양과 컵이 부딪치는 소리의 조합을 모릅니다. 비 온 뒤 젖은 석조 건물에서 피어오르는 특유의 습기 냄새도 모릅니다. 그래서 AI가 만든 파리 여행기는 정확하지만 메마릅니다.
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AI는 수만 가지 레시피를 조합해서 “파프리카와 고수를 넣은 태국식 퓨전 카레” 같은 새로운 요리를 제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을 본다”는 행위, 즉 혀끝의 감각으로 미묘한 맛의 밸런스를 잡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소금 한 꼬집이 너무 많아서 전체가 망가지는 순간, 설탕을 조금 더 넣으니 갑자기 모든 맛이 화음을 이루는 순간—그런 ‘손맛’의 세계는 데이터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통찰에 도달합니다. 데이터는 ’건조(Dry)’하고, 경험은 ‘습하고(Wet) 뜨겁습니다’. 예술적 감동은 건조한 정보의 나열이 아니라, 뜨거운 체험이 관객에게 전이될 때 일어납니다.
#3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예술이 된다
작가가 글을 쓸 때, 화가가 붓을 들 때, 작곡가가 건반을 누를 때, 그들은 단순히 머리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과거에 자신이 겪었던 기쁨, 분노, 슬픔의 ‘신체적 기억’을 꺼내어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쓸 때, 그는 단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 자료를 정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망명 생활의 고독, 딸을 잃은 슬픔, 정의에 대한 갈증을 자신의 몸으로 겪었고, 그 고통이 장발장이라는 인물로 흘러나왔습니다. 《이중섭은 죽었다》라는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 저는 1960년대 영화를 수십편씩 보며 그 시대를 느끼려 애를 썼습니다. 혹시나 작가가 마주쳤을 그 거리와 골목의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AI에게는 데이터만 있을 뿐 ‘흉터’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상처받고 치유된 흉터—고유한 역사—가 있고, 그 흉터에서 고유한 이야기가 흘러나옵니다. 흉터는 아픕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 흉터를 들여다보고, 만지고, 작품 속에 새겨 넣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창작의 영감은 클라우드 서버가 아니라, 우리의 ‘몸’에 새겨진 기억에서 나옵니다.
#4 경험하지 않은 자의 결과물은 왜 공허한가
앞서 우리는 AI가 평균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기서 그 논의를 한 걸음 더 나아가봅니다.
남의 경험(데이터)을 짜깁기한 AI의 창작물은 화려하지만 ‘뿌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소비할 때 “잘 만들었다”고 감탄할 수는 있어도, 영혼이 흔들리는 “공명”을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마치 조화(造花)를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형태는 완벽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없습니다.
내가 직접 비를 맞아본 사람만이, 비 오는 장면을 그릴 때 그 차가움과 눅눅함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누군가를 보내본 사람만이, 이별의 장면을 쓸 때 독자의 가슴을 쥐어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리얼리티’의 본질입니다. 리얼리티는 사실성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밀도 문제입니다.
AI는 수천 편의 러브 스토리를 학습해서 완벽한 로맨스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설에는 “이 작가가 정말 사랑해봤구나”라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살았던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군가 서투른 문장으로 쓴 짧은 글이라도, 그 안에 진짜 눈물이 묻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느낍니다.
#5 더 많이 느끼고, 더 깊이 젖으라
그렇다면 AI 시대에 창작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컴퓨터 앞에 앉아 프롬프트를 깎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세상을 온몸으로 부딪치는 시간을 늘리는 것입니다. 좋은 안목과 창작은 ‘검색’이 아니라 ‘산책’에서 나옵니다. 길을 걷다가 발견한 낯선 골목의 풍경,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타인의 대화, 예상치 못한 비에 흠뻑 젖었던 어느 날 오후—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당신만의 목소리가 됩니다.
AI는 데이터를 먹고 자랍니다. 하지만 인간은 경험을 먹고 자랍니다. 경험은 때로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비효율적입니다. 비를 맞으면 옷이 젖고 감기에 걸릴 수 있습니다. 이별을 겪으면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여행을 가면 예상치 못한 일들로 계획이 틀어집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그 비효율 속에서 예술이 태어납니다.
AI는 비를 묘사할 수 있지만, 비에 젖을 수는 없습니다.
젖는다는 것, 그 축축한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나아가 사랑하는 것—그것이 인간 예술가의 특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