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가 일어나는 공간 Affordance in SPACE 13
유이화 건축가 × 임종현 건축주 이야기
지난 6월 FEZH에서 열린 건축가와 건축주의 토크 콘서트 내용을 다뤘다.
한남동의 골목을 비집고 들어서면 갑작스레 시야가 열리며 ‘도심의 반전’이 펼쳐진다. 높지도, 과시적이지도 않은 건물은 벽돌과 나무,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과 빛으로 사람을 품어낸다. 이곳의 이름은 FEZH(페즈). 설계는 ITM 유이화 건축사사무소의 유이화 건축가, 건축주는 디지털다임 임종현 대표다. 두 사람은 다소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힐링”이라는 단어를 건축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 삶의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구현했다. 아래에서는 90분의 대화를 바탕으로, 다섯 가지 주제로 FEZH의 본질을 정리한다.
지난 6월, 한남동 페즈 보텍스 갤러리. 따스한 빛이 드리운 다목적 공간에서 한 건축주의 꿈과 한 건축가의 철학이 교차하는 대화가 펼쳐졌다. 무대 위 두 주인공은 디지털다임 대표이자 페즈의 건축주 임종현, 그리고 건축가 이타미 준(유동룡)의 장녀이자 ITM 유이화 건축사사무소 대표 유이화. 그들의 대화는 단순한 건축 토크를 넘어, 도심 속 건축의 미래와 인간적 치유의 가능성을 드러냈다.
임종현 디지털다임 대표는 1998년부터 디지털 마케팅 업계 최전선에 서왔다. 그러나 팬데믹 시기(2021년 전후), 그는 “디지털의 과잉”을 돌아보게 됐다. 재택근무가 일상화되던 시기, 도심 속에서 휴식과 회복, 그리고 만남을 새롭게 설계할 오프라인 거점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건축가에게 전한 첫 요청은 의외였다. “한남동에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싶습니다.”
대부분의 건축 브리프가 용도·규모·사업성으로 시작되는 관행을 벗어난 접근이었다. 유이화 건축가는 이에 대해 “보이지 않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건축주가 먼저 꺼냈다”고 회상한다. 쉬고, 머물고, 우연히 마주치고, 관계를 맺는 일. FEZH의 출발점은 수익 모델이 아니라 행동 모델이었다.
이 ‘행위 중심’ 접근은 이후의 모든 선택을 규정했다. 카페, 티라운지, 갤러리, 요가와 명상, 재즈 공연, 반려견 클래스, 러닝크루 협업까지. 정적과 동적 콘텐츠가 공존하며 ‘커뮤니티’라는 목표 아래 유연하게 확장됐다. 건축은 단순히 프로그램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행위를 유도하는 도시적 장치로 기능한다.
의도적인 행위가 아닌
자연스런 행위가 일어나게 하는 공간.
여기서는 ‘쉬어야겠다’는
자각이 먼저 일어납니다.
— 임종현 대표
유이화 건축가는 이타미 준(유동룡)의 딸이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현장을 다니며 1mm의 오차까지 집요하게 챙기는 디테일을 몸으로 배웠다. “현장에서는 깡패가 돼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은 그만큼 현장에서의 집착과 치열함을 상징했다. 그는 통역을 하며 ‘물결 치듯 가야 한다’는 지시를 전달했고, 그 결과가 실제로 구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건축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유명한 아버지의 후광은 동시에 무거운 짐이었다. 유이화는 한동안 작품 발표를 중단하고 사무소 운영에만 몰두했다. “아버지와 별개로 내 이름을 알리고 싶었다”는 욕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정신적 자산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아버지가 재산을 물려주신 건 아니지만 철학을 남겨주셨다. 그 점에서 나는 금수저다.”
이타미 준은 생전에 “60이 넘어야 건축이 뭔지 알겠고, 70이 넘어야 비로소 나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알겠다”고 말했다. 유이화는 이 말을 되새기며, 자신을 여전히 성장 중인 건축가로 규정한다. “50대 건축가는 아직 아기”라며, 오리지널리티란 결국 긴 시간 속에서 쌓이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에게 계보는 단순한 혈연이나 복제가 아니다. 존경하는 스승으로서의 아버지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시대와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세우려는 과정. 그것이 유이화가 말하는 ‘계보와 오리지널리티’의 현재형이다.
1. 골목에서 광장으로 | 나쁜 땅이 만든 좋은 건축
FEZH의 대지는 건축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협소한 전면, 길게 뻗은 후면, 1종 주거지역의 규제, 양측 인접 대지, 주차 제약까지. 말 그대로 ‘나쁜 땅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유이화는 이를 제약이 아닌 가능성으로 해석했다. 좁은 골목을 통과한 순간 갑작스레 펼쳐지는 ‘반전의 광장’, 사선의 아크가 소용돌이처럼 사람을 끌어들이는 진입부는 모두 계산된 연출이다. 동선은 직선의 효율 대신 탐험의 리듬을 따르고, 외부로 열린 계단은 빛과 바람, 온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핸디캡 없는 땅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죠.
— 유이화 건축가
2. 보텍스 갤러리 | ‘행위’를 담는 다목적성
1, 2층에 위치한 보텍스 갤러리는 (Vortex Gallery)의 ‘보텍스’는 영어로 소용돌이·회오리를 뜻하며, 건물 동선이 회오리처럼 말려 올라가는 구조에서 착안해 붙여진 이름으로 좁은 골목을 지나 맞닥뜨리는 반전의 공간이다. 유이화 건축가는 “사람이 무방비 상태로 들어와 갑자기 빨려드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며 “직선 대신 돌고 오르는 탐험형 동선 속에서 자연스러운 발견과 머묾이 생기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이 공간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정적·동적 프로그램이 공존하는 무대다. 갤러리 전시는 물론, 재즈 공연과 요가 클래스, 러닝 이벤트까지 다채롭게 활용된다. 특히 세계 강아지의 날에는 강아지와 함께하는 요가가 열렸고, 얼마 전에는 러닝 크루 ‘노룰즈 러닝’과 협업한 이벤트도 진행됐다.
임종현 대표는 “코로나 이후 도심 속에서 누구나 쉬고 교류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보텍스 갤러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라고 말했다. 보텍스 갤러리는 이름처럼 이름처럼 회오리치는 동선은 관람과 체류를 뒤섞고, 사용자는 자연스럽게 “다음 장면”을 기대하게 된다.
3. 재료 | 벽돌·탄화목, 그리고 물과 새소리
주재료는 특주 벽돌과 탄화목이다. 매끈한 표면 대신 흙의 거칠고 따뜻한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수차례 실험을 거듭했으며, 비가 내리면 벽돌은 더욱 깊이 숨 쉬듯 색이 짙어진다. 탄화목은 시간에 따른 색의 변화를 늦추어 건축의 시간성을 드러낸다. 여기에 흐르는 물과 설치 작품을 통해 들려오는 새소리가 더해진다. 이는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도심 속에서 자연을 불러들이는 감각적 장치다. 외부 계단과 테라스를 오르내리며 이용자는 바람과 빛을 온전히 느낄 수 있고, 공간은 흙과 나무, 물과 소리가 함께 직조하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완성된다.
4. 이웃과의 공존 | 루버·빛·소리의 배려
한남동 주택가에 자리한 FEZH는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건축”을 원칙으로 설계됐다. 1종 주거지역이라는 제약 속에서 민원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소음·조명·동선을 세심하게 다뤘다.
외부에는 루버를 설치해 시선과 빛샘을 차단하고 소음을 완충했으며, 옥상과 상부 동선도 주변 생활권을 거스르지 않도록 차폐 설계를 적용했다. 전시·공연·요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지만, 주변 주거에 미칠 영향을 늘 고려하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주차 공간 극대화 대신 지하 광장의 공공성을 지키는 선택을 하며, 건물 자체가 “이웃과 젠틀하게 공존하는 태도”를 담도록 했다.
자연은 녹색만이 아니다.
바람·빛·소리·시간이 곧 자연이다.
— 유이화 건축가
FEZH의 운영은 세밀한 디테일까지 ‘행위의 자율’을 설계한다. 젠더 프리 화장실, 카페의 옵션 평등(디카페인 추가요금 없음) 같은 장치가 그 예다. “이 건물에 들어온 사람은 나와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머무르는 법’을 배운다.”
콘텐츠는 끊임없이 회전한다. 세계 반려견의 날 요가, 재즈 공연, 노룰즈 러닝과의 협업, 도슨트 투어, 보텍스 갤러리 토크까지. 건축은 매일 새로운 사용 시나리오를 받아 적는 도시형 플랫폼이 된다.
두 사람은 벌써 “시즌2”를 이야기한다. 장소는 “자연”에 더 가깝게, 발리의 레퍼런스와 제주에서의 실험 가능성을 모색한다. 다만 원칙은 분명하다. 법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 자연 앞에서의 겸손, 환경과의 조화, 사람의 행위를 섬세히 받쳐주는 디테일이다.
올가을에는 ‘이타미 준’ 전시도 예고됐다. 도시와 자연, 유산과 현재, 건축과 행위가 다시 한 번 이어질 예정이다.
FEZH는 “힐링”을 슬로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사람이 쉼을 ‘선택’하게 만드는 장치들을 건축적·운영적 디테일로 배치한다. 골목, 반전, 보텍스, 체류, 탐험, 발견의 리듬, 재료의 시간성과 감각, 이웃과의 배려, 규범 없는 규범들. 그 모든 것이 합주해 “도시 속 쉼”이라는 난제를 풀어낸다.
FEZH는 “멋진 건물”이 되기보다, 매일 다른 행위를 받아 쓰는 도시의 공책이 되기를 택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에서 의식적으로 쉬고, 머무르고, 마주치고, 배우고, 다시 걸어 나온다.
도시는 그렇게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글. 정리 : 김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