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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또 May 30. 2016

오베라는 남자

깐깐한 독거노인의 보석 같은 과거 들여다보기

*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점에서 한동안 <오베라는 남자>와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가 한창을 진열장에서 떠나지 않았던 적이 있다. 둘 모두 프레드릭 배크만이라는 스웨덴의 작가가 쓴 책이었고, 동화스러운 파스텔톤의 표지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왠지 모르게 기욤 뮈소의 책 같은 느낌이 들어서 집어 들지는 않았었다. 싫어한다기 보다는 빌려 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달까. ('Don't judge a book by its cover'라는 속담도 있지만 나는 사실 책 표지가 내 스타일이 아니면 첫 장조차도 펼쳐보지 않는다. 하하.)

원작 소설의 작가 프레드릭 베크만

그렇게 '오베라는 남자'라는 텍스트는 기억에서 어슴푸레하게만 남았고, 영화관에서 이 <오베라는 남자>라는 영화 예고편을 볼 때까지도 이 영화와 책을 연결점을 떠올리지 못했다. 예매를 하고 나서도 프랑스 영화겠거니 하고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었다. 첫 대사를 듣고 나서야 어라! 싶은 것이 -물론 프랑스어는 쥐뿔도 모르지만- 프랑스 영화는 아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때쯤 나는 이 영화를 왜 하필 아침에 봐버렸을까 하는 후회로 가득했다. 너무 울어버렸기 때문이다. 여타 한국 영화들을 보고 울었던 경험들을 떠올려 보면 대부분 슬픈 감정을 공략하며 눈물샘을 건드렸다면, 이 영화는 '오베'라는 괴팍한 할아버지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험난한 삶에 대한 '공감'이 관객들을 울게 했다. 사실 어느 포인트에서 울 거다라고 콕 집어서 얘기는 못하겠는데, 나처럼 눈물샘이 헐거운 분들은 한 중간쯤부터 계속 질질 짜게 될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동시에 적당히 녹아들어 있는 스웨덴 영화 특유의 개그 코드들 덕분에 웃기도 많이 웃었다.) 



최근 나온 <곡성>도 감상한 관객으로서, <곡성> 보고 다친 마음에 <오베라는 남자>가 좋은 치유약이 될 거라고 장담한다. 개인적으로는 <곡성>을 아주 좋게 봤지만 호불호 여부를 떠나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꽤 오래 그 어둡고 충격적인 여운에 잠겨있을 거라고 예상된다. 나 역시 그랬고, 그 후에 연달아 본 <싱스트리트>와 이 <오베라는 남자> 덕분에 건강한 정신, 아름다운 심성(?)으로 쉽게 복귀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오베라는 남자>를 완전히 사랑하게 된 입장에서, 이 영화의 매력포인트를 두 가지만 크게 꼽아봤다. 



1.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진짜 변화가 일어난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고 '감정이 움직였다'라는 느낌이 들면 쉽게 영화에 만점을 주고는 하는데, 이 영화는 그러한 면에서 관객들과의 감정 줄다리기를 아주 잘 펼쳐낸다. 무겁지 않게, 한 발짝 한 발짝 오베의 삶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특히나 오베라는 독특한 인물에 먼 나라 사람인 우리조차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는오베 자신조차도 관객과 같은 속도로 스스로를 이해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긴긴 오베의 이야기들을 듣고 그의 영원한 사랑 소냐를 회상하고 나서야, 오베와 우리는 동시에 오베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오베는 변한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화만 내는 사람도 아니었고, 이유 없이 공무원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반작용으로 그의 안에서 들끓었던 '화'들은, 점점 그의 이웃들, 갈 곳 없는 고양이, 앙숙이 된 옛 친구를 향한 '사랑'으로 뒤바뀌어 뿜어진다

사실 영화가 끝나고 뒤돌아보니, 그의 모든 화에는 이유가 있었고 화를 내는 순간들조차도 그는 꽤 좋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보면 '츤데레'기질이 다분한 할아버지였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치어 죽으려던 기차에 뛰어든 사람을 어쩌다 구하고도 '죽으러 왔다가 죽을 사람을 구했다'며 화를 냈다. 운전을 잘 못하는 새로 온 이웃에게 '후진도 못하는 찌질이'라고 욕하면서 후진 센서를 씹어먹어 버릴 만큼 훌륭한 실력으로 주차를 돕는다. 


그의 날 선 어투 뒤에 숨겨진 따뜻한 마음을, 이웃들은 물론이고 오베 자신조차도 몰랐던 것이다. 몇 번의 자살 시도 속에서 파르바네와 그녀의 아이들을 만나고,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파르바네에게 털어놓으면서, 오베의 따뜻한 내면은 외면으로까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소냐를 이야기하면 그녀에 대한 기억이 흐트러질까 화를 내던 오베는, 이제 소냐가 이루고자 했던 세상과 그녀의 흘러넘치던 사랑을 대신해 베푸는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멋진 할아버지로 변신한다. 



2. 오베의 신념 있는 투덜거림과 사랑스러운 카리스마


우리 주위에는 아주 많은 수의 투덜이들이 존재한다. 나조차도 굉장한 투덜이고,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세상에 그렇게 많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투덜거림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는 만고의 시간이 걸린다. 그냥 말뿐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오베의 투덜거림은 대부분 행동으로 이어진다. 애초에 우리의 투덜거림과 오베의 투덜거림은 근본부터가 다르다. 그는 마을의 주민회를 처음 구성한 청년이었고, 마을의 규약을 제 손으로 쓴 주민회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을을 그 어떤 곳보다도 살기 좋고 깔끔한 곳으로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몇십 년을 마을을 지켜왔다. 그가 세운 규칙들은 분명 지키기에는 까다로워도 마을을 안전하고 조용한 곳으로 유지하는 데 분명히 일조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오베는 마을의 규칙이 깨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그의 신념이 깨지고 그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깨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오는 투덜거림은, 충분히 생길 법하다.


소냐와 가장 행복했던 시기에 가장 최악의 사건이 터지고야 만다

또한 그의 아내 소냐가 사고로 인해 걷지 못하게 됐을 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교사 자리를 구하기가 힘들어지자 그는 화를 내기 시작한다. 그녀를 걷지 못하게 만든 버스 운송 업체, 국가, 심지어는 사고의 원인이었던 음주를 비난하며 와인 회사까지 고소한다. 마침내는, 소냐의 휠체어가 계단을 오를 수 없다는 이유로 그녀를 거절한 학교에 가서 직접 경사로를 만든다. 휠체어를 탄 그녀가 요리를 하기 쉽도록 주방 높이를 자기 손으로 뚝딱뚝딱 모두 낮추어냈다. '죽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천사 같은 소냐의 의지에 응하며, 오베는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슈퍼맨 투덜이'가 된 것이다. 


행동력만큼이나 오베를 멋진 남편감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카리스마다. 그는 쓸데없는 것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무엇이 중요한 지를 알고 핵심을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르바네에게 운전을 가르치는 도중에 그녀가 운전을 두려워하자 오베는 그녀에게 소리친다. 당신은 애를 둘이나 낳은 엄마고, 저 멀리 이란 땅에서 이 곳 까지 온 사람이 아니냐고. 그 힘든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걸 다 이겨낸 사람이 운전을 무서워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리고는 파르바네의 미숙한 운전을 참지 못하고 빵빵거리는 뒤차의 젊은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다. 거구의 늙은 할아버지가 어쩜 저렇게 남자다운 매력이 풀풀 넘치는지, 정말 저런 남편만 있어도 세상 무서울 것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오베라는 남자, 정말 괜찮은 남자였다.   




오베는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그는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로부터 자동차에 대한 사랑을 물려받았지만 (특히 사브 자동차) 아버지 역시 그가 학생일 때 기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고, 또한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되었던 '소냐'야말로 오베의 인생의 중심이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것은 오베의 소냐에 대한 사랑이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니다가도, 소냐의 무덤에 가면 너무 보고 싶다고 울상을 짓는 오베의 얼굴, 자살을 하려다가도 소냐의 사진을 보고 감추지 못하는 오베의 미소는 소냐가 얼마나 오베에게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아버지도, 집도, 소냐도 지키려 했지만 결국은 다 잃어버린 오베가, 사실 괴팍하지 않기도 쉽지 않다. 방어만으로는 그가 지키려고 하는 것들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가 지켜야 할 마지막이었던 소냐에 대한 기억을 위해 그는 더욱 필사적으로 남들을, 세상을 공격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삶과 소냐가 주었던 사랑을 마음 깊이 이해한 후부터, 그에게는 지킬 것들이 더욱 많아진다. 이웃 파르바네와 그녀의 아이들, 앙숙이지만 한 때는 좋은 친구였던 루네,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뭐 어떻냐는 오베의 말에 커밍아웃하고 집에서 쫓겨난 미르사드, 심지어는 지저분한 길고양이마저 지켜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렇다고 오베의 공격력이 하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베의 공격은 이제 더욱 정당한 곳을 향한다. 지켜야 할 대상들에게 위협이 되는 것들을 해치우고, 막아낸다. 그것이 오베의 사랑 방식인 것이다. 


집을 빼앗아갔던 '와이셔츠 부대' 공무원을 싫어하는 오베. 결국 그들로부터 앙숙 이웃 루네를 지켜낸다.


오베의 시크하지만 유쾌한 유언장은 이렇게 말한다. 장례식에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만 오게 하라고. 그리고 오베의 장례식장은, 그 누구보다도 많은 이들로 가득한 장례식이 된다. 오베의 괴팍함과 깐깐함은 많은 이들을 지켜냈고 결국 오베를 사랑하게 만든 것이다. 


이유 있는 화를 낼 줄 아는 독거노인 오베.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그의 과거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모든 과거를 아는 우리 관객들은 영화 속 누구보다도 오베를 '숙명적으로'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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