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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Sep 01. 2018

Episode 1.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

치앙마이. 첫 날 오후부터 저녁까지

여행을 오면 묘한 압박감이 있다. 모든 순간 순간이 재미있고, 모든 풍경이 멋있어야 한다는 압박감. 친구들이랑 여행을 갈 때 줄곧 리더를 맡았는데, 그럴 때 특히 심했다. 힘들게 간 곳의 풍경이 굉장히 별로라든지, 비싼 돈 주고 먹은 음식이 그저 그랬다든지. 오래 걸어다녀서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여행에서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면 이끌어가는 입장에서 참으로 아찔하다. 그래도 여럿이서 가면, 힘든 순간에도 “그래도 멋있네!”, “먹을만 하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더 힘 내자”라 하며 일행의 사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꼭 있어 금방 분위기는 좋아진다.

친구란게 그런거 아니겠는가.

혼자 여행 와서 짜증나기 시작하면 답도 없다. 혼자 다녀도 즐겁고 알차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이 있다. 사방팔발 여행간다 자랑하고 다녀서 그런지 SNS는 즐겁게 다니는 모습만 올려야 할 것 같고, 여행 수기에도 긍정적인 문장으로 가득 채워야 할 것만 같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떠나서도, 내가 여행에 투자한 시간, 돈, 노력 등 기회비용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하면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찬다. 순간 순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간 순간이 고통스럽다. 혼자라서 누구 말 할 사람도 없다.

내가 도대체 왜 이 곳에 왔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여행 첫 날이 딱 그랬다. 오전까지만 해도 숙소 근처에서 밥만 먹었지 아직 본격적으로 어디를 다닌 것은 아니라 좋기만 했다. 허나 님만해민 골목길을 떠나 올드타운으로 가는 길목부터 조금씩 기분이 다운됐다. 일단 날씨가 너무 흐리멍텅했다. 5일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와 달리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많이 껴서 너무 흐렸다. 도로도 상당히 혼잡했다. 신호등 하나 없는 도로에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매연이 가득했다. 도로변을 따라 쭉 걷다보니 숨이 턱턱 막혔다. 평소 같으면 흐린 날씨가 다니기 좋다고 생각했겠지만, 차라리 햇볕 쨍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구름 낀 하늘 아래에서 사진도 잘 안나오기도 했고 말이다.


도착한 곳은 치앙마이의 중심부에 있는 올드타운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현대적인 분위기의 님만해민과 달리, 직사각형의 해자와 성곽으로 둘러쌓인 이 곳은 고대 유적지 분위기가 나는 구도심이라고 한다. ‘쁘라뚜’라 불리는 5개의 성문 중 내가 들어간 곳은 ‘수안 독 게이트’라는 성문인데, 그 입구까지도 자동차와 바이크의 엄청난 행렬이 이어졌다. ‘올드타운’이라는 명칭이 주는 아우라가 있어 성문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딛기만 해도 고대 유적지가 많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더라. 물길 따라 걷는 것을 좋아해 기대했던 해자도 고인물이라 그런지 많이 탁했다. 매연만 가득했던 게이트 앞에서, 또 한 번 실망한 순간이다.

 

당장 들어가자마자 멋진 사원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꽤나 유명한 장소들이 많았다. 구글맵스에 표시해둔 장소들 다 찾아다닐까 하다가, 이미 지쳐있는 몸을 이끌고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해자를 따라 올드타운을 돌며 마사지샵부터 찾아다녔다. 태국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다니다가 힘들면 근처 마사지샵에 갈 수 있다는 것. 피로를 푸는게 우선이었다. 마사지샵에 가는 길에 유명하지 않은 사원 몇 개를 지나쳤는데, 엄청 멋있더라. 딱히 불교 공부를 하고 온 건 아니라 구체적인 명칭이나 용도는 잘 모르겠다. 한국, 중국, 일본을 다니며 본 불교 건축물들과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고, 무엇보다 태국의 상징 코끼리상들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멋진 두 사원들이 잠시 발목을 잡았지만, 쿨하게 뒤로 하고 마사지 받으러 갔다. 마사지는 끝내줬다.


마사지가 끝나니 피로도 한결 풀렸고, 날씨도 조금 풀려 있었다. 올드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스파로 와서 20분 가량을 다시 걸어가야 했는데, 파란 하늘이 보여서 기분 좋게 걸어갈 수 있었다. 아무리 찍어도 분위기가 안 살던 사진도 느낌있게 잘 나오기 시작했다.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차들도 아주 잠깐 예뻐 보이더라. 역시 날씨는 좋고 봐야 한다. 올드타운으로 다시 돌아갈 때는 창푸악 게이트라는 북문으로 들어갔다. 수안 독 게이트보다는 훨씬 더 평화로웠던 창푸악을 지나 올드타운으로 들어가니, 아까보다는 괜찮은 거리가 눈 앞에 있었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삼왕상이 있는 광장이다. 올드타운의 중심에 있어 창푸악 게이트로부터 조금 걸어가야 했는데, 입맛을 다지게 하는 길거리 상점들이 간간히 보였다. 오는 길에 5바트짜리 닭꼬치도 하나 먹었음에도 태국식(?) 치킨팝콘을 하나 더 사먹었고, 생과일 쥬스도 한 잔 했다. 진열해 둔 생과일을 바로 칼로 손질하여 갈아주니 왠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마침 근처 학교의 하교시간이었는지 학생들도 많이 사먹는 모습이 보여 안심하고 먹었다. 옆 가게의 달콤한 핫케이크 냄새를 뒤로하고 발을 옮겼는데, 그새를 못참고 카페에 들어가 밀크티 한 잔 했다. 피로도 좀 풀고 배도 차니 다운됐던 기분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찍사한테는 멋진 피사체와 경치가 눈 앞에 있으면 그걸로 최고다. 삼왕상은 태국을 건국한 세 왕의 조각상인데, 조각상 자체는 사실 초라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멋있긴 한데 크기도 많이 작았고, 별 거 없었다. 뒤에 있는 박물관 건물, 앞에 있는 광장과 함께 렌즈에 담으니 조각상에 비해 훨씬 더 멋있었다. 삼각대 없이 구도 완벽하게 맞춘 상태에서, 사람이랑 차가 한 대도 뷰파인더에 안 들어올 때 찍으려 욕심내다보니 한 자리에 30분은 있던 것 같다. 나중에 찍고 보니 뒤에 구름까지 베스트컷은 사진은 맨 처음에 이미 찍었었고, 나머지 사진들에서도 자동차나 바이크가 앞에 지나가는게 더 느낌있었다. 삼왕상 옆으로도 괜찮은 건축물들이 많았는데 하늘이 맑아 사진이 다 잘 나왔다. 찍사 본능에 사진이 완벽하니 무엇이 부족하리.


그 뒤로 여러 사원을 구경했지만 큰 감흥은 없었다. 사원마다 건축 양식이 조금씩 달라 보는 맛은 있었지만 내부에 큰 불상 있고, 옆에 거대한 황금사리탑이 있는 구조는 다 비슷했다. 처음 볼 때야 감탄이 나왔지 계속 보다보니 지겨웠다. 유럽가서 끝도 없는 성당에 질린 느낌이랑 비슷하달까. 다른 것 뭐 볼 거 없나 찾아보니 올드타운 내에는 거의 사원 뿐이었다. 박물관도 별로 끌리지 않았고, 그냥 사원 몇 개 더 돌아보다가 말았다. 사원이 많아 좋았던 점이 하나 있다면 불상 앞에 앉아 편히 쉴 수 있다는 것이다. 신발을 벗고 내부로 들어가니 선풍기 아래 땀을 식히고 있는 관광객들이 꽤나 보였다. 마음 편히 쉬기는 정말 좋은 공간이었다.


관광은 금방 포기하고 오후 4시쯤  미리 찾아본 맛집으로 향했다. 아이폰이랑 아이패드 둘 다 배터리가 거의 죽어서 그냥 숙소로 돌아가려다가, 이제 어느정도 길은 다 외웠다는 생각에 식당으로 향했다. 태국에서 정식으로 온 두 번째 식당은 ‘Lert Los‘라는 생선 요리집이었다. 치앙마이가 바다와 맡닿아 있는 곳은 아니라 해산물이 유명하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서울에서 자취하며 생선을 너무 못 먹어서 여기서라도 먹어야겠다 싶었다. 태국식 샐러드인 쏨땀과 돼지고기 요리, 생선 구이, 싱하 맥주를 하나 병 시켰다. 태국 물가 싸다고 원래 한두가지면 될 것을 서너개 이상 시키니 돈이 꽤 나오더라. 생선이 좀 비싸서 그랬지 보통 다른 음식집에서 로컬푸드 세 접시 시켜도 만원이 안나오기는 한다. 아, 생선은 생각보다 맛없었다. 학교 앞 청사초롱에서 먹는 고갈비가 최고다.


굳이 숙소 안돌아가고 음식점까지 간 이유는 맛집도 맛집이지만, 바로 앞에 ‘타페 게이트’때문이다. 올드타운 동쪽 성문인 타페 게이트 앞 광장에서는 매주 주말 큰 시장도 열고 쏭크란 같은 축제 때도 많은 행사를 진행한다고 한다. 지금은 그저 비둘기 광장이었다. 여행지마다 있는 넓은 광장의 닭둘기 떼와 관광객에게 먹이를 파는 잡상인들. 제일 싫어하는 풍경이다. 길거리 음식 때문에 배가 찬 상태로 저녁을 먹어 속이 안좋았는데 비둘기까지 잔뜩 보니 너무 짜증났다. 얼추 돌아가는 길은 익혀뒀지만 폰 배터리 없는게 불안하기도 했고, 금방 뒤를 돌아 숙소로 향했다.



그래도 걸어다니며 올드타운 분위기 좀 더 느껴봐야지.

안일한 생각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동문부터 서문까지 올드타운을 관통해야 했는데 쭉 큰 길이 이어져서 차도 많고 혼잡했다. 낮에 님만해민에서 올드타운 오던 그 길이 오버랩됐다. 낮과는 달리 양 옆으로 특색있는 상점들이 있어 볼거리는 조금 있었지만 짜증 가득한 내 눈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중간에 길 한가운데 크게 사원 부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서 길도 잃어버렸다. 차도 중간에 떡하니 가로막고 있길래 그냥 관통하면 될 줄 알았는데 뭐 이리 복잡하던지.

어찌어찌 올드타운을 벗어나긴 했는데, 다시 숙소로 가는 그 길이 문제였다. 퇴근 시간이라 교통량도 엄청났고 날씨도 다시 흐려져 전체적으로 탁한 분위기였다. 골목길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봤는데, 치앙마이 길이 서로 연결되어있지 않고 계속 막다른 길이 나오는 식이라 큰 길로 갈 수 밖에 없었다.이제와서 택시 타기는 돈이 아까웠다. 표정에 온갖 짜증을 머금은채 숙소로 걸어갔고, 가자마자 세수하고 골아 떨어졌다. 원래 해질녘만 되면 저녁노을 보려고 애를 쓰는 나이지만 하루종일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잠깐 쉬려고 누운 침대에서 바로 잠들더라. 쉽지 않은 하루였다.

자다가 일어나긴 일어났다. 첫 날 밤을 이렇게 마무리 할 수는 없지.
해 진 뒤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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