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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고객이 말해도 듣질 못한다.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엔 편견이 병목이 된다.

by 바다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초등학생도 박사급의 인공지능을 무료로 다룰 수 있고, 원하는 데이터는 클릭 몇 번이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고객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이를 이겨낼 해결책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고객을 잘 알고 있다는 환상


UX리서처라는 직무로 밥 벌어먹고 살고 있습니다. UX리서처는 고객의 삶을 들여다보고 회사 구성원들이 고객이 중심이 될 수 있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을 돕습니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이 직무가 필요한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회사가 아니라 고객이 먼저고, 고객 중심의 의사결정을 내려야 회사가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제가 남들보다 고객을 잘 알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스타트업 대표나, 새로운 사업을 하는 회사의 임원이나, 혹은 실무진이 찾아와 조언을 구하곤 합니다. 사람마다 결이 조금씩 다르지만,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습니다.

“저에게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있는데 고객들이 과연 잘 쓸까요”

“고객에 대해서 잘 알려면 어떤 방법론을 써야 합니까? 설문이 좋습니까, 아니면 인터뷰가 좋습니까?”

“저희는 고객 인터뷰도 50명이나 했고, 데이터도 전문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서비스가 성장하질 않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분에 넘치는 기대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저를 찾아 귀한 발걸음을 하셨으니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답변합니다. 보통은 이런저런 고객 유형이 있으며, 어떤 방법론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어떻게 데이터를 해석하면 좋을지. 하지만 언제나 이런 식의 질문으로 시작하는 대화는 본질을 찾지 못하고 빙빙 도는 느낌입니다. 질문도 있고 답변도 있으나 정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질문할 대상이 잘못되었거나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두 가지 모두 잘못된 경우가 많습니다.



첫째로, 고객보다 전문가를 먼저 찾는 경우입니다.

대화를 나누면서 ‘자사의 서비스를 고객이 어떻게 반응할지’ 저에게 예측해달라는 식의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질문입니다.


저는 고객에게 질문하는 사람이지 고객이 아니거든요. 제가 수백 명의 고객을 만났으니, 고객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정반대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고객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는 느낌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한 두어 명 만나보면 가장 잘 아는 느낌을 받고 오히려 어느 순간을 지나면 모든 것이 영 낯설어집니다. 말 그대로 오리무중 五里霧中이지요.

Q: "저희 고객이 왜 제품을 안쓸까요? A기능 때문일까요?"

A: "마지막으로 고객과 대화를 한 적은 언제일까요?"

Q "그게. 몇 달전에 설문조사를 하긴 했는데.. 개발하느라 아직 바빠서요."

A. "한 번 10명만 만나보고 오세요, 그래도 어려우면 도움을 드릴게요."

저를 만나러 퇴근 이후 귀중한 시간을 낼 시간은 있지만 고객을 만날 시간은 왜 없는 걸까요. UX리서처든 유명한 업계의 사람이든 고객이 아닌데, 그들에게 찾아가서 우리 고객이 어떤지 알려달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인 상황이 있을까요.


둘째로, 겉으로는 고객을 들여다보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전문적인’ 방법론을 따라 고객을 분석하고 인터뷰하고, 데이터를 통해 의사결정을 내려왔지만 정작 고객은 만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공급자라는 새장에 갇혀서 고객의 세계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A: 고객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나요?

B: 첫 퍼널에서 왜 이탈했는지, 그 다음엔 두 번째 퍼널 경험은 어땠는지, 그 다음엔 마지막 퍼널이 어땠는지 체계적으로 인터뷰하고 분석했어요.

A: 고객이 ‘퍼널’대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나요?

B: 아뇨,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 구조화해서 분석할 수 있으니요..


최근에 지하철 요금이 1,400원에서 1,550원으로 인상되었는데요. 지하철 탑승이 부담되는 고객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하철 입구의 경험은 어땠습니까? 그다음에 개찰구 경험은 어땠습니까?, 그리곤 탑승 경험은 어땠습니까?”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요즘 지갑 사정은 어떤지, 지출을 줄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더 이치(理致)에 맞겠습니다. 그러나 서비스 공급자들은 종종(아니 자주) 전자처럼 접근해서 고객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고객에 대해 전혀 알 수 없게 됩니다.


고객은 서비스를 사용하는 사람이기 전에 우리와 같은 세상에 사는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현대사회’라는 맥락 속에 던져진 동료들이지요.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둘도 없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하고, 아주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서비스 공급자는, 과감하게 말하자면 하루 종일 숫자를 들여다보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프로그램을 돌려가며 ‘분석’을 해도 사람에 대해 거의 이해하지 못할 만큼 타락했습니다. 고객을 만난다 하더라도 ‘관광적으로’ 접촉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공급자와 고객의 견해 차이가 외계인과 지구인만큼이나 멀다는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고객 전문가에 대한 환상


“정규화된 리서치 프로그램과 전문적인 리서처들이 있어서 부러워요.”

“저희팀도 UX리서처를 당장 채용하고 싶은데,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요?”


제가 리서치팀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회사에 있기 때문에 ‘UX리서처’ 라는 명함을 가진 사람이 조직에 없는 분들이 이런 말을 건네곤 합니다. 고객 전문가가 없기 때문에 회사의 성장이 더디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동안 경험에 따르면, 리서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문가가 나서야 제대로 된 관련 학위가 있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이 나서서 고객을 ‘제대로’ 만나고, 전문적인 스킬을 갖추고 분석해서 명료한 해석을 이끌어내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맡았던 증권 UX컨설팅에서 공감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프로젝트를 수주한 저와 팀원들은 고객들의 계좌개설 과정과 금융상품 거래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고, 이를 논리적으로 분석한 리포트를 작성했습니다. 고객들의 투자성향, 평소 금융지식등을 파악하고 서비스를 사용하는 과정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에 맞춘 논리적인 솔루션을 제시했기 때문에 금방 실서비스에 적용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만 첫번째 발표를 마치자 어째서인지 담당자들은 우리가 찾은 고객의 문제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시큰둥한 태도였습니다.


이에 저는 다음 발표에 동영상 하나를 준비했습니다. 고객이 서비스 가입을 해보려다가 너무 어려워서 핸드폰을 던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영상을 보자 실무진들은 그제서야 ‘아..’ 하며 고객의 어려움의 실체를 피부로 느꼈습니다. 이후에 개편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물론입니다.

UX를 배웠거나 혹은 IT업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디자인씽킹 프로세스(Design Thinking Process)’에 대해 알 겁니다. 디자인씽킹 프로세스는 사용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하는, 정석 프레임워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1) 고객에게 공감 → 2) 고객과 비즈니스 문제 정의 → 3) 해결책 아이디어 내기 → 4) 검증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 제작 → 5) 테스트로 검증 순서입니다.


그런데 이 프레임워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놀랍도록 소외되는 영역이 있습니다. 바로 첫 번째 단계인 공감하기(Empathize)입니다. 서비스 공급자들은 대부분 나머지 영역에 대해 더 자주 언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정의’와 ‘프로토타입’, ‘검증’ 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하고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귀납적 추론방법과 연역적추론 방법을 익히고 가설이니 뭐니하 는 복잡한 개념을 공부하고 AB테스트를 정교하게 설계하는 방법을 배우고, 편히 쉴 수 있는 주말까지 투자해서 최신 기술을 접목해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비유는 외계인 비유인데요, 대단한 학문을 갖춘 외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을 분석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수억 명의 인간이 아침에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며 발걸음의 보폭은 어떤지 패턴을 분석한다고 해서 아버지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침을 시작하는 이유가 집에 남겨둔 사랑스러운 아이 때문이라는 사실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더 흥미로운데요. 이름을 알만한,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회사는 UX리서치팀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UX리서치팀을 갖추면 성공하는 서비스를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좋아 보이는 것은 좋아 보이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도, 제대로 문제를 정의하고 검증하려면 UX리서처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바로 앞서 말한 두 번째 이유, ‘규모가 있는 스타트업, 회사들은 UX리서처가 있더라.’ 때문입니다.


이는 반은 맞는 말이고 반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규모가 작을 땐 UX리서처가 없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우버, 인스타그램, 에어비앤비, 스포티파이, 틴더 그리고 우리나라로 토스나 쿠팡, 카카오. 이들 모두 지금은 ‘전문가’ UX리서처가 있지만 서비스를 창업할 때나 어느 정도 자리 잡기 전까지는 UX리서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공한 회사들은 UX리서처가 있지만 UX리서처가 있어서 성공한 회사는 드뭅니다.


에어비앤비 창업가인 Brian Cheskys는 첫 고객인 Amal과 일주일동안 시간을 보내며 그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UX리서치팀은 겉으로만 멋있어보이고, 실제로는 핵심적인 일을 해낼 수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창업주들이 전문적이진 않더라도 직접 고객을 만나가며 그들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인지심리학과 HCI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본인의 겪은 불편함을 직접해소하거나 불편함을 가지고 있는 고객을 직접 만나가며 명확한 문제를 두 눈으로 마주했고 이를 바탕으로 서비스를 개선해나갔습니다. 디자인씽킹 프로세스의 가장 중요한 첫단계, 공감하기(Empathize)는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손에 흙을 묻히겠다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이유를 가지고 UX리서처를 채용하겠다는 분들에게는, “뽑지 않아도 된다.” 고 말씀드립니다. 창업주가 직접 고객을 많이 만나보고 그 이후에 채용해도 늦지 않습니다. 리서처가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고 ‘전문가’가 있어야 고객을 만나볼 수 있다는 생각은 틀렸습니다. 대부분 전문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직접 고객을 만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전문가에게 맡기고 알아서 잘 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조직이 있다면, 과감히 말하자면 고객 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게으른 조직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남의 말을 남의 말을 빌려서 듣겠다는 것입니다.


리서처가 필요한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창업주가 직접하고 있지만 시행착오가 많고 비효율적이라 전문가 도움을 받고 싶어서” 입니다. 이 때가 전문가가 ‘투입’되기에 적적할 시점입니다. 앞서 말한 회사도, 제가 몸담은 회사도 같은 시기에 UX리서처를 채용했습니다. 핵심 고객들을 찾았고, 그들의 문제에 공감도 했으나 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작업이 너무 비효율적이라 서비스 성장에 힘쓸 시간이 부족할 때가 찾아옵니다.


뮬 디자인스튜디오<Mule Design Studio>의 Founder이자 꼭 필요한만큼의 리서치<Just Enough Research>의 저자 에리카 홀은 숙련된 전문가가 투입될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대규모의 복잡한 프로젝트 혹은 조직

복잡하거나 민감한 주제(아이, 질병)

사악한 조직 내 정치

리서치 훈련을 할 수 있는 팀원의 부재


이 시기에 시니어, 리드급의 UX리서처가 투입되어서 고객의 문제와 비즈니스 문제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하며 고객 중심 문화를 구축하는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가가 투입된 이후에도 반드시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시도를 꾸준히 해야합니다.




시장의 함정 고객이 곧 시장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고객에 집중하는 대신 무엇을 보느라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하나는 시장(Market), 그리고 경쟁사(Competitors)입니다. 농담이 아니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경쟁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링크드인을 확인하고, 뉴스레터를 읽고, 경쟁사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업계 스피커들의 의견을 귀담아들으려면 잘 여유도 없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보다 어려울 지경입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시장의 크기를 들여다보며 의사결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배달업계 시장 규모가 32조이니, 우리가 진출해서 10%만 점유율을 획득하면 3.2조를 얻을 수 있고, 게다가 이 시장은 점점 성장할 테니 우리는 잘 될 일만 남았다고 주장하는 식입니다. 혹은 우리 서비스에 접속하는 주류 고객이 30대 남성고, 30대 남성의 월지출액이 000,000원이기 때문에 이들을 공략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통적인 시장의 크기(Market Size)를 측정하는 방식은 대단히 인기가 있습니다. 왜냐하 SOM(Serviceable Obtainable Market), SAM(Serviceable Available Market), TAM(Total Addressable Market)으로 범위를 넓혀가며 ‘원대하고 거대한 숫자’를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용업계 시장이 크다고 고객들은 우리 화장품을 쓰지 않고, 교육 시장이 크다고 우리 서비스에서 강의를 결제하지 않습니다. 투자를 끌어내야 하는 피치덱에서는 유리할지 몰라도 시장의 규모를 중심으로 의사결정하게 되면 자산을 무엇에 투자할지 명확하지 않아지며, 필요 이상의 과도한 리소스 투자가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현실적인 방법은 시장의 규모보다 ‘고객의 고통의 크기’ 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Startups Should Do “Value Pool Sizing”, Not “Market Sizing” 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고객 고통을 기반으로 추정한 시장 규모 :
= 고객의 숫자 X 고객 한 사람당 고통의 크기 X 자사 서비스가 제시할 수 있는 효율


시장의 규모에서, 실제로 우리가 접근가능하며, 자사 서비스가 제거할 수 고객이 겪는 비효율의 크기를 깎아내고 나면 알짜(?)는 의외로 적게 남습니다. 고객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오래된 프레임워크는 무의미하고 새로운 프레임워크를 공부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콘스탄티노플이나 베이징이 크기는 잘 알아도 동네 골목길은 잘 모르는, 오래된 지인이 악한인지 바보인지는 잘 모르면서 역사상 모든 주요 인물에 대한 지식을 과시하는 강의를 하는 그런 부끄러운 학자가 될 수는 없으니까요. 마찬가지로 고객을 위한 서비스를 만들고 있다면, 시장의 규모나 경쟁사의 새로운 기능은 줄줄 외면서 고객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고객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저금리로 안정적인 주택을 구매하고 싶어 하고, 가끔 무리하더라도 나를 뽐낼 명품이나 사치를 부리고 싶어 합니다. 고객들이 쓰는 제품이 매일 바뀌더라도 근본적인 욕구는 자주 변하지 않습니다. 시장 대신, 적어도 시장을 들여다보는 만큼 고객과 더 자주 대화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객관성의 함정, 다크데이터는 읽지 못한다.


시장과 경쟁사만큼 매력적인 함정은 ‘객관적인’ 데이터입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를 통해 모든 것을 늘 옳은 결정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숫자에만 의존해서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읽는 우리의 뇌는 거짓말에 속기 때문입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 God does not play dice > <다크데이터 : Dark Data>의 저자 영국의 통계학자 데이비드 핸드가 소개한 허리케인 샌디 사례입니다.

2012년 10월, 허리케인 샌디(Sandy)가 미국 동부해안을 강타했다. 당시 샌디는 미국 역사에서 두 번째로 강한 허레케인이자, 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되었다. 75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와 200명이 넘는 인명을 앗아갔으며, 정전으로 금융 시장이 문을 닫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시기 미디어의 역할이다. 샌디의 돌풍과 함께, 관련 트윗이 넘쳐났다. 트위터는 무슨 일이 어디에서 벌어지고, 실시간 사건현장을 중계하는 역할을 했다. 2012년 10월 27일에서 11월 1일 사이에 관련 트윗이 2천만 건이 넘었다. 이 정도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이상적인 데이터로 보인다.

그러나, 나중에 분석해 보니 샌디에 관해 가장 많은 트윗이 발생한 곳은 맨해튼이었고, 로커웨이와 코니아일랜드에서는 매우 적었다. 맨해튼의 지하철이 잠긴 것은 사실이지만, 피해가 다른 곳에 비해 그리 큰 곳은 아니었다. 로커웨이와 코니아일랜드에 트윗이 적었던 이유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샌디가 한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해 버렸다면? 사람들은 그 지역 주민이 무사하리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데이터’가 아는 데이터보다 치명적이다.

의심할여지도 없이 현대사회에서 데이터의 힘은 아주 강합니다. 도저히 사람이 셀 수도 없는 엄청나게 복잡한 계산, 인과추론, 실험을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이를 통해 최적화된 솔루션을 도출해줍니다. 그러나 한계를 인지하지 못하고 데이터에만 의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객관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합니다.


대고객 서비스에서 ‘원천 데이터’는 고객입니다. 우리는 고객이 가진 24시간 중 앱에서 머무른 고작 5분의 로그(log)를 100갈래로 나눠서 분석하면서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으쓱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대규모 설문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중요합니까?’ 라고 만 명에게 물어본다면 돈에 대한 인지만 알 수 있고 돈보다 사랑이나 가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도 우리는 편견 속에서 보고 싶은 것, 그리고 측정할 수 있는 것만 수집할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다크데이터>의 서문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술 취한 사람이 가로등 아래서 열쇠를 찾는 오래된 농담을 잘 알 것이다. 그 사람이 거기에 열쇠를 떨어트려서가 아니라 무엇을 보기에 빛이 충분한 곳이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 만약 자신이 가진 데이터만 바라본다면 과학자, 분석가, 그리고 데이터로부터 의미를 뽑아내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술 취한 사람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우리는 스스로도 모른 채로 취한 채 의사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객관적인 관찰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여럿의 해석이 남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예방접종 직후 자폐증 진단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예방접종이 자폐증을 일으킬까요? 둘은 대략 같은 나이대에 일어나는 사건들로 불가피하게 우연히 나타날 따름입니다. 이러한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숫자를 떠나 자폐증의 메커니즘이나, 아이들의 예방접종 시기의 생활양식이나, 병원에서 어린 환자를 대하는 시스템을 파악해야하죠. 우리는 이것을 맥락(Context)라고 합니다.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자세히 서술하진 않겠지만, 우리가 흔히 ‘명제’라고 부르는 것들은 현실 세계에서 하나 이상의 해석을 가집니다. 언어의 미결정성 논제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고객이 특정 상품 소개 콘텐츠를 끝까지 본 경우, 우리는 흔히 “이 상품에 관심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도 있습니다.


단지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기 때문에

콘텐츠의 스타일이나 구성 방식이 독특해서 흥미로웠기 때문에

영상에 등장한 사람의 외모가 내 스타일이라서 (?)

이 상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끝까지 보며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 고객이 콘텐츠를 ‘봤다’는 행동만으로 그 내면의 동기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동일한 행동에도 다양한 해석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객 데이터를 해석할 때 특정 명제가 명확한 결론을 내기 어렵다는 한계를 인지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인데요, 진리에는 길이 없다고 합니다. 진리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게 아니며 그것이 진리의 아름다운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석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고, 이를 제대로 하려면 고객의 행동을 측정하는 것뿐 아니라 고객을 둘러싼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관습적 사고의 저주들


그렇다면 우리의 해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인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퍼널적 사고’와 ‘방법론의 저주’를 떠올립니다.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저서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 1962)》 에서 사고의 선입견이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는 사례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서구의 식물학자는 아무 쓸모 없는 잡초를 수집하고 그 이름을 원주민들에게 묻는데, 원주민들은 식물학자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먹을 수도 없는 것을 왜 알아내려 합니까?”


그들에겐 그 잡초는 삶과 무관해서 특별한 이름조차 줄 필요가 없었습니다. 잡초의 이름을 아는 것은 무엇이든 분류하고 체계를 갖추어야 하는 ‘서구의’ 식물학자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지만 원주민들의 삶에서는 "의미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레비스트로스는 서구인과 원시인은 사고의 방식이 다른 맥락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한쪽의 사고가 열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고객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급자들은 공급자의 시선대로 고객을 보려는 문제가 있으며 저는 이를 관습적 사고의 저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퍼널적 사고의 저주, 고객은 퍼널은 지저분하다.


언젠가부터 IT업계엔 ‘퍼널적 사고’의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퍼널 분석은 사람들이 서비스에 유입되는 과정부터 특정 행동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단계별로 분석하고, 각 단계별 전환율을 측정하고 개선하는 작업입니다. 문제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측정가능한 단계로 나누어 사고하는 것은 분명히 이점이 있습니다.


퍼널적 사고의 문제는 ‘퍼널’로 측정 불가능한 경험을 마치 퍼널에 의존해서 다룬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하게 만들려고 한다고 가정합시다. 첫 번째 퍼널을 아이를 거실로 오게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 퍼널은 방문을 여는 것이고, 세 번째 퍼널은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고, 네 번째 퍼널은 책을 고르고 펼치게 하는 것이고, 마지막 퍼널은 책을 읽는다고 정합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나요? 책을 읽는 과정은 ‘이런 식으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책의 흥미로운 구절을 알게되어 미가 생겨서 책을 찾기도 하고. 아름다운 표지에 이끌려 펼쳐보기도 하고, 그냥 심심하다는 이유로 책을 꺼내 들기도 합니다. 책 한 권을 읽게 되는 과정 하나만 봐도 인간의 행동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극도로 단순한 행동을 제외하곤 고객의 행동은 대부분 비선형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맥락적인 존재이며 퍼널 깔대기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비스 공급자들은 퍼널 분석 프레임워크를 이런 식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퍼널은 고객의 구매과정을 인지(Awareness) → 고민(Consideration) → 구매(Purchase) 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나 이는 실질적으로 고객이 느끼는 감정, 브랜드와 상호작용 등 맥락적인 정보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버립니다.


구글은 2020년 messy middle’ of the purchase journey 라는 리포트를 발간했습니다. 고객이 물건을 구매할 때 단순히 발견, 평가, 구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중간 단계(messy middle)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펼쳐지며 방대한 정보와 선택지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측정가능한 퍼널만큼이나 고객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인 인지편향에 대해 이해하고 공부해야합니다.


퍼널을 측정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객을 이해하기도 전에 퍼널이라는 벽을 세워서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는 것의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로, 퍼널적 사고를 고객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공급자 중심적인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방법론의 저주, 방법론은 성경도 율법도 아니다.

학부생 때 들은 디자인 전공 수업 중 하나는 <디자인 방법론 : Design Methods>였습니다. 교재로 ‘Universal Methods of Design<한국어판 : 디자인 방법론 불변의 법칙 100가지> 이라는 100가지 리서치 방법론을 소개한 책을 사용했습니다. 지금도 업계에서 많이 사용하는 AB테스트, 카드소팅, 인터뷰, 설문을 포함해 연애편지, 작별 편지처럼 기상천외하고 다양한 방법론의 개괄을 공부했습니다.


매 주 단어시험보듯이 방법론 퀴즈를 치렀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렇게 겨우겨우 방법론 100개를 숙지하고 대학원에 갔더니 글쎄, 교수님이 “너만의 방법론을 새롭게 만들어봐”가 과제로 주는 겁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세상에 정해진 방법이란 없고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설계하려고 이 고생을 해가며(?) 다양한 방법론이 있다는 사실을 배웠구나. 그 후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기존의 방법론을 참고하되, 완전히 같은 방법론을 쓴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얽매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배운 셈이지요.


그런데 취직을 하고 일을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정해진 몇 개의 방법론만 고집하고 있었거든요. 대표적인 예시가 사용성테스트(Usablility Test)와 AB테스트입니다. 전자는 우리가 만든 제품이 의도한 대로 사용하는지 관찰할 수 있고, 후자는 대규모 트래픽을 사용하여 변수를 최소화하고 인관관계를 추정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무작위 통제 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입니다.

https://andrewchen.substack.com/p/10-years-after-growth-hacking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특정 방법론들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 외의 방법은 시도조차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만 찾아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기업에서 “우리가 AB테스트와 그로스 해킹에 열광하게 만든 Andrew chen은 2024년 《10 years after "Growth Hacking" 》에서 그로스해킹과 AB테스트의 한계가 있다며 회고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단순한 AB테스트로는 본질적인 시장 적합성을 찾기 어렵습니다. 고객이 찾지 않는 서비스는 자잘한 개선이 아니라 가격이나 제품 자체의 과감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스타트업뿐 아니라 새로운 프로젝트의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AB테스트는 장기적인 변화가 필요한 가설을 검증하지 못합니다. AB테스트는 본질적으로 빠른 가설검증을 통한 진전을 요구하므로 2주 이상 테스트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유튜버들이 고양이 영상을 더 많이 올리도록 유도하면 어떨까? 고양이 영상 몇 개 추가된다고 즉각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수십만 수백만 개가 쌓이면 확실한 변화가 나타날 것입니다. (저는 고양이를 좋아하니까..)


퍼널적 사고와 마찬가지로, 방법론을 따르다가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방법론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이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적절하게 사용하면 유용하지만, 집착하게 되면 창의성을 억누르고 사고를 경직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방법론은 상황에 맞게 조정되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버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불교경전에 <뗏목의 비유 (raft parable)> 라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살이 거친 강을 건너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리도 배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풀과 나뭇가지 등으로 정성껏 뗏목을 만들어 강을 무사히 건넙니다. 그런데 건넌 후 그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려 합니다. 뗏목을 이는 지혜는 있으나 뗏목을 내려놓는 지혜는 없었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요긴했던 학식이 거친 강보다 더 어려운 시련이 되는 법입니다.


부끄럽게도 저 또한 리서처라는 타이틀을 들고 이런저런 강연에 마이크를 쥐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편견없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객을 바라보는 것이 최고의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면 질문 속에서 바로 방법론(답)을 꺼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질문 속에는 언제나 다른 질문이 숨어 있으니까요.






고객에게 공감하려면 고객을 관람하지 마세요.


우리가 고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도록 그들을 직접 만나고, 접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유적으로도, 실제로도요. 왜 이렇게까지 수고를 들여 직접 만나야 할까요? 아이러니하게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기 가장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인종, 다른 국가, 다른 성별, 다른 집단의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하루, 아니 단 몇 초 만에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피곤함을 굳이 감수하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귀찮을뿐더러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고 알아보려는 것은 인지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이죠.


인간의 편견은 생각보다 강력합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측정하는 로슬링 테스트(”당신의 주변에 동성애자가 몇 명 있다고 생각하세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세요.?”)를 시행한 모든 나라에서 원숭이가 사람을 이겼습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해야하며, 직접 만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수단입니다.


앞선 식물학자 사례에서, 우리가 원주민의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더 똑똑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관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인간적인 존중을 쌓고, 감정이나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라포’를 구축하고 그다음에야 그들의 언어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51309280004690


편견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접촉 가설> 그는 서로 다른 생각,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진짜’로 더 자주 접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적대적 사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있다면 편견을 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편견을 이겨내고 누군가를 이해하는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접촉과 더 가까운 접근을 하는 것 뿐이라고요.


우리는 직접 닿았을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지식은 너무도 흔해졌습니다. 고객이 필요한 것을 아는데도 우리는 해줄 수 없습니다. 공감할 수 없으니까요. 지식의 부재가 아니라 접촉의 부재가 고객 이해를 늦춥니다. AB테스트,시장 분석, 퍼널 분석, 데이터 사용의 한계를 이야기했습니다. 각각의 도구가 쓸모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너무나 쓸모 있는 나머지 그 도구들에 의존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서비스를 기획하고 프로덕트를 만들고 마케팅을 할 때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고객이 먼저고 회사가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고객이 먼저 있고,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서비스가 탄생합니다. 맛있게 먹어줄 고객이 없다면 육즙 가득한 햄버거도 썩어가는 유기물에 불과합니다. 종종 “이 지면에서 매출이 떨어졌으니 문제다” 라고 생각하고 그 뒤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곤란합니다. 고객을 수단으로보게 되고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니까요. 주제 넘은 발언을 하자면 회사가 부여받은 사명은 사람들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객에 대한 공감은 아이디어에 대한 열정보다 앞서야합니다.




창문을 열어두세요, 사랑의 달빛으로 노크를 해야죠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모르니까 겸손함과 열린 태도를 가지고 꾸준히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이야기를 길게 쓴 것뿐입니다. 글재주가 없어서 길이 늘어졌네요.

제가 요즘 즐겨듣는 노래 <도시아이들>의 노래 <달빛 창가에서>에서 이런 가사가 등장합니다.


그대의 창문은 열릴 줄 모르니 사랑의 달빛으로 노크를 해야지


상대의 마음은 ‘내’ 힘으로 열 수는 없습니다. 애정을 가지고 감응해야지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고 싶다면 나의 앎을 침묵시키고 상대방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른이란 타인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은 아직 자신밖에 모릅니다. 자라면서 동년배의 마음, 친척의 마음, 가족의 마음, 지역공동체의 마음을 익혀갑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닫힌’ 어른이 되면 더 이상 타인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피곤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자기 멋대로 군다’든지 ‘분위기를 못 읽는다’ 든지 하는, 타자와 마음에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어른 취급’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식을 인간 사회를 만들어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객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아이인 셈입니다.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으로 고객을 보겠다는 열린 태도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인공지능 시대에 데이터는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빨리, 더 많은 데이터를 더 쉽게 수집할 수 있겠죠. 좋은 의사결정으로 이끌지 못하는 병목은 데이터의 부족이 아니라 나 자신의 편견이 될 것입니다.


제목을 조금 자극적으로 썼습니다. 제목에서 ‘당신’은 저 스스로를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세계에 갇혀 고객의 방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는 부끄럼 많은 모든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안타깝게 우리는 나 자신의 세상 밖을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타인은 영원히 타인이지요. 그저 그들이 보내는 신호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창문을 열어두세요. 그래야 햇볕도 바람도 지저귀는 벌레도 들어올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다들 고객에게 귀를 기울입시다!








p.s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은 이메일을 주세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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