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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화가 에르바르트 뭉크(Edward Munch)

영혼의 자백 

‘어느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한쪽에는 마을이 있고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피곤하고 지친 느낌이 들었다. 

해가 저물고 있었고 구름이 피처럼 붉게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그 절규는 마치 실제처럼 들렸다. “          

이 글은 뭉크가 [절규]라는 작품을 작업하게 된 계기에 대해 토로한 것이다.    


  

<절규> 1893. 보드에 템페라 . 오슬로 국립 미술관 

노르웨이 화가 에르바르트 뭉크(Edwarr Munch)(1863~1944) 는 실존적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직하게 펼쳐보인 화가이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과 질병의 천사가 자신을 따라다녔다‘던 고백처럼 그의 그림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러워져 있다. 

그의 그림은 불안과 고독, 질병과 죽음으로 일평생 고통받았던 한 인간의 기록이기에 충격과 불쾌감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불안과 질투, 공포와 절망이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현실의 구속에 갇히지 않은 인간 내면의 과정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심층 심리 내면의 불안, 우울, 공포, 죽음 등의 주관적인 감정들이 미학적인 형태로 왜곡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채 어두움 그대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에겐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면적 고통의 솔직한 직면 덕분에 관객들로부터 보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는 의사였던 아버지와 이지적이고 자상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의 둘째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군의관이었다가 이후엔 빈민가의 의사로 지냈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뭉크의 유년 시절에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을 경험하였다.  

5살 때 서른 살의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나이 14살에 엄마처럼 따르던 누나 소피가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하게 된다. 결핵과 류마티시즘을 앓아 병약했던 뭉크는 13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홈스쿨링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약병이나 누워있는 사람 등의 모습을 그리는 등 혼자 지냈고 유령 이야기에 탐닉하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아버지는 엄격하고 차가운 양육 태도를 보였으며 가족들에게 극단적인 청교도적인 삶을 강요하였다. 자신이 의사였지만 가족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증과 종교에 집착하는 광신도의 모습으로 보였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뭉크는 화가였던 이모 손에서 자랐으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여동생 라우라는 조현병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여동생이 입원한 병원을 방문할 때 괴상한 소리를 내는 환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였다. 조현병은 망상, 환각, 와해된 언어, 극도로 화해된 또는 긴장성 행동, 음성장애 등이 상당 기간 존재해야 한다.  뭉크의 정신병에 대한 두려움은 가족력과 냉담한 아버지의 태도, 가혹한 가정 환경과 연결될 수 있다. 

1879년 20세가 된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공과대학에 진학하지만 화가가 되기로 하고 대학을 중퇴한다. 이후 오슬로 미술공예 학교에 들어간다. 

뭉크의 남동생 역시 결혼 직후 사망하였으며 아버지도 뭉크가 26세가 되던 해 사망하고 만다. 가족들의 연속적인 죽음은 그의 자아형성 시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이를 상실한 경험은 이후 뭉크의 예술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우울하고 고독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은 뭉크의 그림에 도사리는 모호하고 어두운 그림자로 형성되었는데 그의 그림에 드러난 검은 그림자는 그가 말한 공포와 슬픔과 죽음의 천사들일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889년 그의 일기장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 나의 아버지는 정신병적일 정도로 신경질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었고 강박적인 종교인이었다. 나는 그로부터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죽음의 천사들은 내가 태어난 날 부터 내 곁에 있었다. ”     


유년시절 겪은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와 아버지의 냉혹한 양육방식은 부정적인 정서를 뿌리내리게 했을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유아기에 겪은 강력한 정신적 충격과 불안한 감정의 기억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해마에 저장된다고 설명한다.

뭉크의 유년시절 경험은 건강한 애착대상의 상실과 가혹한 양육환경에 비롯된 애착 외상이라고 볼 수 있다. 애착 외상의 가장 중심적인 징후는 ’깊은 불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성인기의 사람들 관계에서 ’편안함‘과 ’안정감‘을 찾기 어려운 성인 애착 문제의 소지를 갖게 한다.

뭉크가 경험한 가족들의 죽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정서적 고통을 일으킬 수 있었고 냉혹한 양육 환경 속에서 ’심리적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조율해 주는 대상이 없었기 때문에 정서 조절능력의 발달에 어려움을 있었을 수 있다. 

심리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면 이런 일련의 경험은 ’두려움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마도 ’마음을 마음으로 안아주는 경험이 없는 것‘, 즉 ’홀로됨‘이라는 핵심적인 애착외상 경험일 것이다. 애착 외상에서 ’홀로됨‘은 이미 수많은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성인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많은 성인 이후 정신증적 장애와 관련되어 있다. 


<불안> 1896. 오슬로 뭉크 미술관


Blatt(2008)의 말을 빌면 ’초기 애착 관계는 일생동안 겪는 근본적인 심리적 발달 문제와 관련되는데 상호적이고 의미 있으며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인관계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과 일관되고 현실적이며 분화되면서도 통합된,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자기감]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에 기반을 제공한다.

 뭉크의 불우했던 어린시절은 두려움의 순간에 정서적으로 자기 스스로를 위로도 할 수 없었고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관계성‘과 자기정의(자율성)’라는 경험의 근본적인 양 극을 개발하고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 두 가지 성격 발달의 노선이 정상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성숙하며 포괄적 성격의 구조로 통합되게 된다. 이를 Erikson 은 ‘자아정체성(self identity)’이라고 하였다. 


그런 면에서 뭉크가 고통받았던 강박과 우울, 정신병 등은 애착 대상의 상실과 건강한 애착 대상이 없는 환경 속에 홀로 성장한 경험, 정신병리에 취약한 유전적인 소인도 관련될 수 있다.  뭉크가 남긴 일기와 그림들은 그의 정신적 고통과 부정적 편향의 사고과정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죽음은 내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병으로 인한 죽음과 상실의 고통이라는 주제는 <병든 아이>라는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사랑했던 누나의 죽음이 그의 심리 저변에 얼마나 강하게 고착되어 있으며 그 때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 충격을 주었는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뭉크의 심정에 공감할 것이다. 

이토록 불우했던 뭉크의 가족사는 뭉크가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며 대결했던 자기 자신의 내면를 이루는데 영향을 주었다.                     

 

1889년 뭉크는 스스로 ‘생 클루 선언 St. Claud manifesto’라고 밝힌 노트에서 ‘ 우리는 더 이상 실내 인테리어나 책읽는 사람들, 뜨개질하는 여성들을 그리지 말아야 한다, 숨쉬고 고통받고, 느끼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겠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겠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사실적인 대상의 재현을 포기하고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겠다는 선언이다. 드가와 르누와르와 같이 인물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던 이전의 사조와 달라지게 된 데에는 20세기 심리학이 대두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유럽 전역에 소개된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다. 


뭉크의 그림은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심리학의 과업과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는 살면서 겪었던 경험에 대한 깊은 인간적 감정과 고통에 대해 탐구하려 하였다. 뭉크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 마치 ‘자아 인식에 대한 질문을 하고 마치 의사가 환자를 들여다 보듯 임상적인 방식으로 탐색’하는데 집중한다.               

프로이드(1856~1939)의 정신분석모델은 현대의 심리학 모델 중 가장 오래되고 많이 알려진 최초의 체계적 모델이다.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 중에 심리 결정론은 과거의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하여 현재의 생각, 행동 그리고 느낌 등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정신분석에서 억압된 충동, 갈등은 이상행동을 유발하는 주요 원인으로 주목하고 이러한 본능적 충동의 억압이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19세기의 심리학은 ‘의식’의 심리학이었다면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1900)에서 처음으로 마음의 지형학적 이론을 기술하였다. 정신의 기제가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서로 다르게 작동한다는 개념이다. 특히 무의식은 의식에서 억압되어 의식에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을 뜻하는데 의식 밖에 있어서 의식 수준에서는 알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이지만 무의식은 꿈, 의도적 망각, 인격 분리, 실수 등의 현상으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무의식은 개인이 의식할 수 없으나 그 개인의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뭉크에게 드리워졌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뭉크의 내면세계를 형성하고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여성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세균에 대한 두려움, 텅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알코올 중독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뭉크는 무정부주의를 신봉했던 한스 예거(Hans Jaeger) 를 필두로 한 노르웨이의 무정부주의자와 진보주의를 자처하는 비평가 그룹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당시 뭉크와 어울리던 보헤미안들은 남녀평등과 자유연애를 숭상하며 전통적인 가치를 부정하였다.    

                                                                  

  

1885년 뭉크는 [병든 아이] [사춘기] 등을 완성했고 이듬해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칠고 암울한 묘사 방식으로 물감을 터무니 없이 칠한 데다가 형태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혹평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평소 존경했던 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지원으로 1889년 10월부터 1892년 까지 세 차례 정부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 ‘에꼴 데 보자르’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뭉크는 학교 수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몇 개월 만에 그만두는 대신 파리에 체류하며 독일과 이탈리를 여행하였고 인상주의와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파리에서 만난 자유로운 영혼 툴루즈 로트레크, 색채로 감정을 표현하는 반고흐와 폴 고갱을 좋아했는데 개성과 에너지로 각자의 내면을 표현한 화가들은 뭉크에게 예술적 지표가 되었다. 

     

1885년 여름 스물 두 살의 뭉크는 자신을 포함한 젊은 화가를 후원하던 화가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스물다섯 살의 밀리 탈로 에게 매료된다. 당시 유럽은 자유주의와 퇴폐적인 세기말적 문화가 만나 자유로운 연애가 이루어졌다. 뭉크는 밀리에게 순정을 바쳤지만 그녀는 매우 자유분방한 여인이었고 여러 남자들과 연애를 하였다. 유부녀이자 자유 연애자였던 밀리 때문에 뭉크는 1889년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그녀와 연애를 했지만 끊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밀리는 결국 전 남편과 이혼하고 다른 남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뭉크에게 어떤 기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뭉크는 여성 전체를 혐오하고 가증스럽게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또한 베를린에 정착해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을 때 만난 음악 공부를 하러 온 고향 후배 ‘다그니 을류’와의 사랑도 그의 여성 혐오에 한몫을 더하게 된다. 다그니 을유는 아름답고 교양과 지성미가 넘쳤고 예술적인 기질이 뛰어나서 주변에는 늘 그녀를 흠모하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다그니 역시 뭉크와 뭉크의 친구와 양다리를 걸친 채 데이트를 즐기다 결국 뭉크를 버리고 친구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녀는 한 스토커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 시기에 그의 불안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 [절규]와 [불안]과 같은 연작이다. 핏빛 하늘 아래 [절규]로 번역 되는 이 작품은 극단적인 불안에 빠진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절규] 라는 작품은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내면화한 그림이다. 사람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고 감정의 압력으로 얼굴 모양도 왜곡되어 있다. 구부러지고 물결치는 하늘과 물의 구불구불한 강한 곡선과 대각선을 이룬 다리는 모두 귀를 막고 있는 한 남자에게 집중된다.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눈과 입을 크게 열고 있는 사람은 스스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절규‘를 듣지 않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귀를 막고 애쓰는 모습이다.      

이 작품 속에는 불안함과 공포가 일렁인다. 멀리 친구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만 거리가 멀고 붉은 하늘은 핏빛 같다. 이 하늘은 노르웨이 오슬로의 피요르드 바닷가의 기상 현상이라고 하지만 이 붉은 색은 불안감을 강조한다. 뭉크는 자연의 절규를 환각과 환청을 통해 보고 들은 것이며 이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다.                                                                                          


이와 비슷한 하늘을 그린 그림은 <불안>이다. 검은 모자를 쓴 어두운 얼굴의 사람들은 마치 해골같이 퀭한 눈에 죽음의 그림자처럼 다크 서클이 내려운 모습으로 현대로 말하면 좀비같은 모습이다.  

뭉크는 자기가 경험했던 연인의 배신과 질투, 버려짐과 버림받음 등의 감정을 강렬한 보색 대비의 색채와 불안정한 구도, 거친 붓터치로 표현하였고 공포감을 그대로 나타내었다. 뭉크의 회화에서 색채는 실제적인 현상과 연결되지 않고 정신적인 표현 매체로 사용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검은색과 붉은색과 갈색은 그의 아픈 과거의 상징이자 분노이며 저항이다. 죽음의 공포와 고뇌하는 인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에 감상자들도 그의 고통스런 내면에 고스란히 다가갈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감상자 자기 자신의 고통에 직접 터치하게 된다. 

검은색은 주로 죽음을 암시하는 색으로 나타나며 붉은색은 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난다. 뭉크의 불안과 공포의 감정은 주로 강렬한 색에 의해 표출되고 날카로운 붓질과 가파른 화면 분할 등에 의해 고조된다. 그의 작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순탄하지 않은 인간의 삶에 대한 심리적 갈등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뭉크의 작품에 나타나는 여성의 이미지는 뭉크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여성을 향한 고통, 두려움, 절망 등의 심리적 투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뭉크에게 여성은 신비로우면서도 위험한 대상이고 성모같은 존재이지만 무기력한 희생자의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메두사, 살로메이다.  뭉크에게 마돈나는 성스러운 마리아이자 남자를 유혹해 파멸로 몰아가는 팜므파탈이었고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존재이다.           


뭉크의 이러한 여성관은 <마돈나>에서 강렬하게 드러난다. 풍만한 육체와 검은 머리카락이 위협적이고 벗은 못을 감싸고 있는 검은 테두리는 음산한 기운을 풍긴다.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 존재이다. 마돈나는 다그니 을유를 떠올리게 한다.      


    

<마돈나> 1894.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 미술관

     

[흡혈귀]라는 작품 속 여자는 남자의 목덜미를 물고 있다. 여자의 붉은 머리카락은 피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남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붙잡혀 있고 모습도 형체도 흐릿하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 전 깊이 사랑했지만 자신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여인 밀리 탈로를 모습을 연상시킨다. <흡혈귀>,<질투>같은 그림은 그의 사랑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는 그림이자 그가 가졌던 연인에 대한 의심과 피해망상 그리고 공포를 드러내기도 한다. 

뭉크가 두 여인 다음에 만난 여인은 여섯 살 연상의 툴라 라르센이다. 뭉크는 라르센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지만 그녀는 뭉크에게 강박적으로 집착하며 결혼을 요구한다.  

툴라의 결혼 압박에 견디지 못한 뭉크는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 뭉크를 집요하게 사랑한 툴라 라르센은 자꾸만 자기를 떠나려는 뭉크를 불러내 권총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뭉크의 왼쪽 손가락을 관통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뭉크는 왼쪽 손가락에 관통상을 당하고 평생 검은 장갑을 착용하고 다닐 만큼 큰 부상을 입는다. 

<흡혈귀> 1895.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 미술관


< 배를 피우는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


    이 당시 뭉크는 [마라의 죽음], [살인녀]같은 작품을 만들며 초인적인 작업량을 쏟아내게 된다. 뭉크에게는 여자는 두 종류이다. 성녀 혹은 악녀.       


                                                 

마라의 죽음(1907)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는 여성들에게 다가가고 싶어했지만 사랑을 얻을 수는 없는 대상과 얽히거나 자신을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여인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과 누이의 죽음은 여성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 대상에 대한 갈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부녀나 다수의 연인과 자유 연애를 즐기던 여성들을 만나며 자신의 애착 욕구는 빈번히 좌절되고 만다.      

뭉크의 작품을 말할 때 생의 프리즈(The Fireze of Life)를 빼놓을 수가 없다. 프리즈란 ( frieze) 건축에서 장식적 조각을 반복하여 구성한 수평의 띠모양 부분을 일컫는다. 왜 생애 프리즈인가 하면 뭉크는 자신의 그림을 ’자백적 자서전‘이라고 한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는 생명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순서로 사랑의 자각, 사랑의 개화와 쇠퇴, 삶의 고난, 그리고 죽음으로 구성하여 작품을 전시하였기 때문이다. 

    1892년 뭉크는 베를린 예술가 협회의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베를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그는 <생의 프리즈: 생과 사랑과 죽음에 관한 시> 연작을 발표하였다. 약 55점을 출품한 이 전시는 전시회가 열리자마자 언론의 집중 혹평을 받게 되고 일주일 만에 종료되고 만다. 일명 베를린 스캔들이다.      

’          

<생명의 춤> 1899-1900 오슬로 뭉크 미술관


“나의 예술은 자백이다. 그것을 통해 나는 세상과 나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고 한다. 이것은 자기중심주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예술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진실을 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사춘기> <마돈나> 과 같은 작품들이 이 범주에 포함된다. 뭉크가 지향했던 자기 내면의 감정 표현, 극단적인 주관성을 표현했던 베를린 개인전은 격한 논쟁을 일으키며 그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그룹과 전통적인 미학을 고수하는 반대그룹으로 양분된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은 한층 높아졌다. 뭉크는 1904년 베를린 분리파에 합류해 <생의 프리즈> 22점을 출품하는 등 1908년 까지 활발한 활동을 한다. 자신을 잠식하는 공포와 불안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며 2만 5천여 작품을 남겼으며 독일 표현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독일을 배경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가던 그의 이면에는 알코올 중독과 신경쇠약, 우울, 조현병이 있었다. 그로 인해 9개월간 코펜하겐 정신병에 입원해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뭉크의 삶은 천식과 류머티시즘, 고통과 죽음 알코올 중독과 조현병 등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 얼룩졌으나 그는 끊임없는 자살 충동에도 불구하고 자살하지 않고 80세까지 살았다.또한 뭉크는 72점에 달하는 자화상을 남겼는데 초기 음울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화상을 그렸던 그가 죽기 두 해 전 [시계와 침대 사이의 자화상]에서는 정리된 모습의 자화상을 선보인다.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 자신의 자세는 흔들림이 없다.                



                                                 

<자화상: 시계와 침대 사이에서> 1940-1943. 캔버스에 유채,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 자신 옆에 서 있는 큰 시계는 인간의 유한성을 의미하는 듯하고 그 옆에 놓인 침대는 편안한 영원한 잠의 상징일까? 흔들리던 여성 혐오는 벽에 걸린 그림으로 간결해 져 있다. 이 그림은 탄생과 죽음과 삶의 유한성과 무상함을 잘 보여준다.      

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마지막 20년은 오슬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홀로 은둔하며 생활하였다. 기록에 의하며 그의 은둔처는 저장 장애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 많은 작품으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 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혼란스럽고 고통스런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과 정신병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던 뭉크가 자살하지 않고 늦은 나이까지 작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비록 그가 외롭고 우울하며 지속적인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긴 했지만 예술창작 활동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얻었어야 할 위로를 스스로 충족하고 작품활동을 통해 자기 위안을 구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뭉크는 자신의 그림을 ’영혼의 일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던 것처럼 그는 평생 예술적 활동을 통해 남들이 모두 피해가는 ’죽음‘이라는 공포와 맞서 싸웠다.      

’나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삶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 필요하다. 불안과 질병이 없다면 나는 방향타가 없는 배일 것이다. 나의 예술은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내 예술의 일부이다. 그것들은 나 자신과 구별될 수 없으며, 그것들의 파괴는 나의 예술을 파괴할 것이다. 나는 이 고통들을 유지하고 싶다. ”      

고통, 죽음, 불안, 고독 등을 주제로 내면세계를 시각화한 그는 작품을 통해 상처입고 고통받은 영혼의 회복을 위해 분투하였다. 유년 시절 스스로의 정서를 관리할 수도 없고 타인의 도움에 의존할 수도 없었지만 그는 예술적 활동을 통해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우울과 불안, 고통과 분노를 조절하고 감소시켜 나갔다. 

한편으론 기괴하고 한편으론 거북하기도 한 그의 작품들은 충격과 혼란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의 삶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들어 가다보면 공포와 불안 그리고 우울 아래 담긴 삶의 비애의 진실과 슬픔을 만나게 된다. 또한 뭉크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서 감상자들이 진정한 자기를 대면하기를 제안하였다. 이는 삶과 작품을 통해 외롭고 고독에 힘겨워하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만나고 진실한 자아를 회복하길 바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뭉크에게 예술은 고통과 환각 속에 고통받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도피처였으며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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