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가을 풍경 보실래요?
나는 전라남도 순천시 해룡면에 산다. 가게는 연향동에 있어 해룡면에서 연향동으로 향하는 길을 자주 오간다. 이 길은 이제 내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계절이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을 바꾸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봄이면 연초록 잎이 가로수 가지마다 반짝이고 여름이면 짙은 녹음이 터널처럼 드리워진다. 가을이면 붉고 노란빛이 고르게 섞이고 겨울이 오면 앙상한 가지마저도 정겹다. 나는 그 길을 사랑한다. 순천 곳곳이 그러하듯, 나의 길 위에도 가로수가 서 있다.
11월의 순천은 또 다른 빛깔로 물든다. 순천은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 도시다. 하지만 그 대신 낙엽이 눈처럼 내린다. 바람이 불면 은행잎이, 단풍잎이, 이름 모를 나뭇잎들이 소복소복 내려앉는다. 그 모습은 마치 순천만 갈대밭을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낙엽은 땅 위에서 또 한 번 바람을 만나 구르며 계절의 마지막 색을 남긴다. 걷다 보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가을의 리듬을 만들어 낸다. 색다른 낭만이 느껴지는 이 계절, 나는 이 때의 순천이 유난히 좋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의 뒤에는 또 다른 풍경이 있다. 순천의 거리를 걷다 보면 어김없이 눈에 띄는 것. 그것은 커다란 비닐봉투에 가득 담긴 낙엽들이다. 길을 가다 보면 스치듯 만나게 되는 풍경. 나무 아래, 가로등 옆, 버스정류장 옆, 혹은 인도 한켠에 커다란 낙엽 봉투가 놓여 있다. 마치 도시의 가을을 수확한 듯한 모습이다. 낙엽이 쌓여 있을 때는 황홀하고, 그것이 봉투 속으로 옮겨졌을 때는 그 뒤에 숨은 손길의 정성이 느껴진다.
낙엽이란 결국 누군가의 손으로 치워야만 하는 자연의 선물이다. 순천에서는 그 일을 참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거리를 오가며 흔히 볼 수 있는 가게 앞에 세워진 빗자루,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상인들의 모습까지. 낙엽의 계절이 되면 이 도시는 '청소의 도시'가 된다.
5일, 연향동의 한 꽃집 앞을 지나가는데,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자기 키만 한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예뻐 보이던지, 아이의 엄마도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아이는 마치 중요한 의식을 치르듯 정성스럽게 낙엽을 쓸어 담았다. 잠시 후 엄마가 말했다.
"그쪽은 아저씨가 청소해 줄 거야. 우리 앞만 하자."
그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구역의 낙엽을 끝까지 치웠다. 나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이 도시는 그렇게 '함께 가꾸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도시구나 싶었다. 낙엽은 이 도시의 풍경이자, 노동의 상징이다. 빗자루는 이 도시의 악기다.
매일 아침 들려오는 '쓱쓱' 소리는 마치 도시의 숨결 같다. 순천에는 공원도 많다. 낙엽을 쓸어 담는 소리 외에도 아침이면 윙윙 울려대는 소리가 들린다. 주민들에게는 참 익숙한 소리다. 잔디를 깎고,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나는 소리다. 그 소리의 리듬을 듣고 있노라면, '정원도시 순천'이란 수식어가 왜 생겨났는지 절로 알 수 있다.
순천의 정원은 단지 순천만국가정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시민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낙엽을 쓸어 담는 손끝마다 정원이 피어난다. 순천만국가정원이 유명해져 전국에서 관광객이 몰려오지만, 이 도시의 진짜 매력은 그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 그들은 도시를 예쁘게 보이게 하려 애쓰기보다 자신이 사는 자리를 깨끗하고 푸르게 가꾸는 일을 일상처럼 해낸다.
커다란 투명 봉투 안에서 노랗게, 갈색으로, 주황빛으로 층층이 쌓여 있는 낙엽들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가을 작품' 같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청소의 흔적이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순천의 손길'처럼 느껴진다. 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불어 낙엽이 마치 눈처럼 흩날리기도 한다. 나는 그 낙엽을 맞으며 잠시 낭만에 빠져본다. 그 순간 낙엽은 계절이 흩뿌린 아름다움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또 다른 시간대에 누군가는 빗자루를 든다. 하루의 일과처럼 반복되는 청소, 그러나 그 반복 속에 순천의 질서와 평화가 있다.
지난 2011년 싱가포르를 여행했을 때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도시와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그곳의 풍경이 참 인상 깊었다. '이런 도시가 세상에 있구나' 감탄했다. 그런데 순천에 와서 깨달았다. 우리나라에도 그보다 더 따뜻하고 더 사람 냄새나는 도시가 있다는 걸. 그것도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순천이다.
순천만국가정원이 유명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지만, 내가 사랑하는 진짜 순천은 '사람이 가꾸는 정원'이다. 해룡면의 길, 연향동의 골목, 그리고 그 길가마다 서 있는 시민들의 빗자루. 이 모든 풍경이 모여 '살아 있는 정원도시 순천'을 만든다. 순천은 깨끗한 도시라기보다 '정성스러운 도시'다. 낙엽 한 장까지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길 하나도 함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이곳에서 사는 나는 매일 아침 가로수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아, 내가 정말 좋은 도시에 살고 있구나.'
바람에 낙엽이 흩날릴 때마다, 나는 그 속에서 이 도시의 마음을 본다. 오늘도 누군가의 손이 빗자루를 잡고, 또 누군가는 커다란 낙엽 봉투를 묶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이 도시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순천의 낙엽은 단지 계절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땀과 정성,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길을 걸으며 마음 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순천, 참 정직한 도시다. 그리고 참 따뜻한 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