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각의 나비> 중. 박완서.
헉 하고 숨을 들이쉬면서 천개사 포교원이라는 간판과 함께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어머니의 스웨터를 보았다. 영주는 멎을 것 같은 숨을 헐떡이며 그 집 앞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루 천장의 연등과 금빛 부처가 그 집이 절이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그밖엔 시골의 살림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부처님 앞, 연등 아래 널찍한 마루에서 회색 승복을 입은 두 여자가 도란도란 도란거리면서 더덕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해로운 분위기가 아지랑이처럼 두 여인 둘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큰 승복 때문에 그런지 어머니의 조그만 몸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큰 나비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 헐렁한 승복 때문만이 아니었다. 살아온 무게나 잔재를 완전히 털어버린 그 가벼움, 그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여태껏 누가 어머니를 그렇게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 드린 적이 있었을까. 칠십을 훨씬 넘긴 노인이 저렇게 삶의 때가 안 낀 천진덩어리일 수가 있다니.
암만해도 저건 현실이 아니야, 환상을 보고 있는 거야. 영주는 그래서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녀가 딛고 서 있는 곳은 현실이었으니까. 현실과 환각 사이는 아무리 지척이라도 아무리 서로 투명해도 절대로 넘을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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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로 집을 나간 어머니를 찾아다닌 지 반년만에 딸 영주는 ’우연히‘ 어머니를 찾게 된다. 이 마지막 결말을 읽으면서 나도 소설 속 화자인 영주처럼 숨이 턱 멎는다.
박완서만이 쓸 수 있을 것 같은. 너무나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이야기. 단순히 헤어졌던 가족이 상봉하는 상투적인 감동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각박한 삶에 갇힌 한 여인(어머니)이 마침내 그 속박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자유‘로워 진다는 ‘이야기’는 현실에 갇혀 사는 ‘나’에게 잔잔한 감동과 희망을 느끼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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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분명 내 기억 한구석에 이 장면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아마도 'TV 문학관’이나 ‘베스트 극장‘이었던 것 같다. 이 TV프로그램에서 훌륭한 한국 소설들을 영상으로 만났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나도 오래전에 봤던 TV 화면이 떠오르다니. 당시에도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