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는 것은.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안다.
나는, 본디 게으르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며, 특히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운동과 움직임, 그리고 실행의 중요성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서, 사람으로서 1인분의 몫을 해내기 위해서 기어코 움직인다.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하려면 "환경설정"이 가장 중요한데, 나 같은 사람에게는 환경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걸 잘 알기에, 나는 내 눈높이에 맞춰 환경설정 하나만큼은 기똥차게 잘한다.
예를 들면, 어느 날 내 삶에 "걸음"이라는 단어가 정말 1도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프리랜서이기 때문에 집에서 수업하는 날들이 잦았던 지난날.
정말 10 보도 걷지 않는 날들이 종종 있었기에, 해도 해도 너무 할 수준으로 걷지를 않으니 나는 내 차를 자발적으로 없앴다. 대신 대중교통을 선택했고, 이 때문에 조금이나마 3-4000 보라도 걷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하지만 걷는 건 여전히 싫기에, 내 사전에 '산책'이란 없다.
산책이 싫은 이유는 너무 많은데, 그중 몇 가지를 꼽아보자면:
1) 여름엔 벌레 이슈 - 벌레라면 다 싫다.
2) 겨울엔 날씨 이슈 - LA에 최적화되어있는 나의 몸뚱이는 한국 날씨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3) 날씨 좋을 땐 사람 많음 이슈
등등 싫은 것도 많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많은 나에게 산책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옵션이다.
(이불 안이 제일 좋고 안전하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제부터 나는 자발적으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피크민"이었다.
그렇다. "피크민"이라는 귀여운 생물(?)들을 "걸으면서" 키우는 게임말이다.
이 게임은 걷는 게 포인트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집안에서 걷는 건 걷는 걸로 쳐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무조건 나가야 한다는 슬픈 사실...
내 피크민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 시작된 산책이었다.
근데, 어제 처음으로 나가서 걸어봤더니 이 '산책'이라는 게 주는 그 특별한 포인트가 여러 개 있었더라는 거다. 뭔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데, 풀어보자면 이렇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랄까. 이 좋은걸 왜 이제야 알았나 싶고. 돈 한 푼 들지 않는 최고의 낭만이라는 걸 난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싶고.
우리 동네에 6년 동안 거주하면서 이렇게 멋진 공원이 있고 천이 흐르고 신호등이나 사람 생각 안 하면서 정말 무념무상으로 "걷기"만 할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있었는데 나는 왜 아파트 짐만 고집을 했던 건지. (멍청아!)
어쨌든, 과거는 과거고. 이제라도 산책의 묘미를,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으니 그걸로 됐다. 앞으로 날씨 좋을 때 많이 해놓으면 되니까. 산책이라는 게 돈처럼 미리 쌓아두고 조금씩 꺼내 쓸 수 있는 그런 건 아니다만, 그래도 그 정도로 욕심이 날 정도로 산책의 참된 의미를 알아버린 이상 그냥 걷고, 또 걸으련다.
어제는 7000보, 오늘은 9000보.
내일은 또 얼마나 걷게 될까.
늘어나는 걸음수만큼 나의 피크민도, 나도 무럭무럭 성장하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