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 년 넘게 곪아 있던 뾰루지가 터졌다. 똥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라일락 향이 난다. 라일락은 모든 지나간 것들의 아련함이다. 죽은 것들은 몸에 둥지를 튼다. 씨앗이 되어 오늘 뿌리를 내릴지 무덤이 되어 추억의 향기를 터뜨릴지는 알 수 없다. 희망과 절망은 이미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운 아니면 섭리 그것도 아니면 우연이다.
슬픔이 차오르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흐른다. 진짜 슬픔은 눈이 먼저 알고 공기 중에 숨어있던 슬픔을 끌어모아 터뜨린다. 누구의 호흡이고 누구의 피였을까. 잊혀진 습기들이 공기에 스며 있다. 까닭 모를 슬픔은 공기 탓이다. 미세먼지보다 미세한 슬픔이 모두의 폐부에 쌓여 있다. 잊고 살던 사람이 폐암 말기 선고를 받는다. 가슴이 먹먹할 때 병원에 가야 한다. 가슴속에 난 뾰루지는 무엇으로 진단할까.
슬픔의 아들 우울은 도무지 배부를 줄 모르고 아귀처럼 모든 기쁨을 잡아먹는다. 땀과 눈물과 오줌과.. 은 모두 말라 버려 건조한 사람이 된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점액질로 변한 우울이 폐부를 가득 채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찐득하게 흘러내리면 온몸도 흘러내려 땅에 쏟아진다. 어머니가 엎지른 밀가루 반죽같이 볼성없이 바닥에 붙어 흐르지도 못하고 질척거린다. 밟고 가는 구두 밑창이 하이힐 위로 치마 속이 잠시 보이다 사라진다. 세계로 흩어진 발자국에 그 흔적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을 따름이다.
남은 것은 향기와 이제는 까닭을 알만한 갑작스러운 눈물뿐이다. 아벨이 흘린 것과 그리스도가 쏟은 것들은 진즉 글자로 변해 버렸다. 모두들 더러운 것을 참지 못한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과 더러운 것은 다르다 하나 같게 취급받는다. 망막에 맺혀 땅에 얼룩진 검고 흰 자욱들만이 그때 이곳에 슬픔이 있었다는 아포칼립스다. 마지막 칠 년이 지나고 마지막 함성이 울려야 우연과 운을 기대하던 피곤함이 투명해질 거다. 지금은 눈물만이 가장 뜨겁고 투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