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련화 Jul 21. 2017

퇴사 후 내가 가장 작아졌던 순간

대한민국 직장인 중 대출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나와 남편에게도 당연히 갚아야 할 대출이 있었다. 대출은 나의 오랜 친구.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맺어진 대출과 나의 인연은 참 끈덕지게 10년이라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회사를 다닐 적에 대출을 연장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재직증명서, 소득증명서 정도만 들고 가면 은행 창구의 직원들은 항상 내게 밝은 미소와 친절한 서비스로 단 몇 분만에 연장 업무를 처리해 주었다. 오히려 업무 시간을 쪼개어 은행 창구에 가는 짬을 내는 것이 내겐 더 어려운 일이었다. 

참 순진하기도 하지. 아니 세상 물정을 몰랐던 걸까.
퇴사를 한 뒤, 대출 만기가 돌아올 쯤이 되자 나는 해맑은 목소리로 은행에 전화를 걸었다.
"대출 만기가 돌아와서 먼저 연락드렸어요. 연장을 하고 싶은데... 이전 회사에서 퇴사를 한 뒤라서 재심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은행 창구 직원은 내게 변함없이 밝고 맑은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아. 이직하셨어요? H사, S사로 가셨어요? 아님 외국계? 금리변동은 조금 있으시겠지만 연장에 무리는 없으세요. 재직증명서 보내주시면 바로 대출금리 확인해 드릴게요!"
"아뇨. 퇴사했어요. 지금 소득은 없고요. 대신 남편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가계소득은 발생하고요."

아~ 네. 그만두셨구나.
그럼 지금 일을 안 하시는 거예요?
흠... 대출 연장은 어려우세요.
전액 상환하셔야 합니다.


전. 액. 상. 환?! 놀란 마음에 몇 가지를 챙겨 은행 창구로 직접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똑같았다. VIP 도 넘어서 플래티넘 고객이라며 추켜세워 줄 때는 언제고, 방실방실 웃던 창구 직원 얼굴엔 이미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도 답답했겠지. 아무 대책 없이 퇴사를 할 줄은 몰랐었나 보다. 육아휴직이 아니라 진짜 퇴사한 거냐며 몇 번이고 내게 다시 물었다.

휴직이 아니고
정말 퇴사를 하신 거죠?
퇴직금으로라도 미리 상환을 하시지.
재직증명이 없으시면 저희도 방법이 없어요.


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은행 창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있는 나에겐 "회사원 ○○○"이라는 설명 이외에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보였다. 재직증명서 한 장이 없어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간 내가 사회에서 살아왔던 게, 나름의 대접을 받고 산다고 생각했던 게 나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내가 다니던 회사의 이름값이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10년 동안 사회생활을 했던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휴직이라고 해서 한쪽 발이라도 걸쳐 두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나는 그날 밤, 남편 앞에서 한참을 울고 잠든 남편 옆에서 새벽이 늦도록 배겟머리를 적셨다.
같은 자리에 누워 있었지만, 남편 옆에 누워있는 나는 어린아이가 된 마냥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퇴사를 한 뒤 무언가를 배우러 혹은 가르치러 다니고,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노라면 내가 무직이라는 사실을 잠깐씩 잊을 때가 있다. 몇 시간만에 종아리가 퉁퉁 부어서 저녁 내내 마사지를 해주어야 할 때는 회사를 그만둔 것이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더 나을 수도 있다며 스스로 위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활동들이 은행 창구 앞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재직증명으로 보여지지 않는 활동들은 하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그저 나는 회사원이 아닌 사람일 뿐.

불쑥불쑥 사람들의 질문을 받을 때, 은행 볼일을 보러 갈 때, 나도 모르게 트랜스포머처럼 자동 변신을 한다. 조금씩 어깨가 안으로 접히면서 공손하고 조그만해진 모습으로 변신!
퇴사를 하기 전에는 스쳐 지나가는 저 질문이 얼마나 사람을 작아지게 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퇴사 후 내가 만난 가장 냉정한 사회의 모습이자, 타인의 시선이었다.

그럼 지금 무슨 일 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사무실은 야생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