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를 먹으며 우리의 관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서야 이해가 되는 장면이 있다. 결말을 봐야만 이해가 되는 순간이 있다. 나 또한 이별을 하고서야 그 날을 이해했다.
나와 그는 만나지 삼 주년이 되는 그 달에 헤어졌다. 봄에서 여름으로 지나갈 무렵이었다. 일에 치여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중이었다. 우리 둘은 주로 삶의 불만을 이야기했다. 연애 초반, 핑크 렌즈로 세상을 볼 때와 달랐다. 부정적인 이야기로 힘을 뺀 뒤에는 애써 낙관과 위로로 대화를 끝냈다. 고된 일, 인간관계 스트레스, 불안한 미래 같은 이야기로 끝을 내면 나와 그의 사이마저 위태로울까 걱정이 됐다. 마지막 위로는 위태로운 관계를 잇는 포장지 같은 용도였다.
헤어진 날로부터 두 달 전, 나와 그는 마장동 축산시장에 갔다. 명동에서 일박으로 호텔을 잡아두고, 영화를 보고, 저녁은 축산시장에서 먹기로 했다. 연애 초기부터, 그는 마장동에 아주 아주 맛있는 한우집이 있다고 했다. 언젠가 꼭 나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대학 동기 아버지가 단골이라 알게 되었다고 했다. 한우집을 이야기할 때 그는 약간 흥분했다. 한우집 사장님은 서비스로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미역국을 주시는데 일품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를 사귀며 여러 번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지 2년 10개월 만에 약속을 지켰다.
축산시장 초입에는 거대한 '황소 마스코트'가 서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동료들이 죽어 진열돼 있는데.. 웃을 수가 있나? 입구를 지나고, 그의 발걸음은 살짝 빨라졌다. 나는 발걸음이 느린 탓에, 종종 천천히 걸어달라고 말할 때가 있었다. 이 날은 그러지 못했다. 가끔은, 가장 많은 걸 보여준 사람에게,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말도 못 하게 된다. 축산시장을 걷는 내 정신은 조금씩 아득해졌다. 습도가 높아서 일까? 고기들이 내뿜는 피 냄새가 코끝 깊숙이 들어왔다.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축축한 물기가 신발 밑창에 느껴졌다. 혹시 핏물은 아닐까? 바닥을 내려다보니 하수도에서 생쥐 한 마리가 바쁘게 지나가고 있었다. '양지, 사태, 등심, 안심...... 우둔살.. 채끝살..' 부위별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고기를 보며 역겹다고 느꼈다. 아마 역겹다고 느낀 건 '나 자신' 일 것이다.
굴다리를 지나니, 식사를 겸할 수 있는 한우 집들이 즐비해있었다. 몇몇 호객행위를 지나니, 평소 말하던 한우집이 나타났다. 모둠 소고기를 하나 시켰다. 간과 천엽이 나왔다. 서비스 육회도 조금 나왔다. 주인분은 경상도 사투리를 쏟아내며 소고기 부위를 설명해주었다. 간, 천엽, 육회.. 그리고 소고기를 먹으며 '언젠가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카운터 너머로 큰 칼로 소고기 부위를 써는 장면이 보였다. 입속에서 우물대는 소고기들이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다.
소고기를 먹는 동안, 그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언어들을 쏟아냈다. 소고기를 먹을 때 '간'부터 시작해야 한다느니, 핏물이 살짝 보일 때가 맛있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소고기 몇 점을 먹자 내 앞접시는 살짝 빨갛게 물들었다. 먹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는 '왜 이렇게 잘 못 먹냐고' 말했다. 질문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데려와 준걸 생각해서 더 먹었다. 추가로 소고기를 더 시키자는 제안도 받아들였다.
나는 느꼈던 것이다. 우리가 만나 서로의 세계를 보여주며 "신기하지? 이게 나야!" 외치던 때는 끝났다는 걸. 사귀면서 서로의 세계를 주욱 일자로 늘어놓았다. 이별이 다가오는 때, 주섬주섬 늘어둔 자신의 세계를 하나씩 챙겨 넣었다. 이번 여행은 관계를 정리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걸 직감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마음이 둥글어 보여 좋았다. 나를 그대로 둘 것 같았다. 내가 성장하도록 지켜봐 줄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가 나를 견뎌내지 못할까 불안했다. 그런데, 마장동 축산시장을 생각하니, 내가 그를 견뎌내지 못했다. 둥글게 둥글게. 세상이 정해놓은 길을 굴러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참 좋은 사람일 거다. 고통을 감내하는 능력도 높고, 유머감각도 좋다. 일상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다. 같이 굴러갈 사람이 있다면, 둘도 없이 행복하게 살 사람이다. 그에 반해, 나는 길을 굴러가다가 이 길이 맞는지 자꾸 돌아가 봐야 하고, 주변에 무슨 일은 없나 오지랖도 부려야 하고, 가끔 '이 길은 길이 아니야!!'라며 화도 내야 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나라서 미안할 때가 많았다.
삼 년간의 연애를 끝낸 지, 삼 개월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그에게 미안한 점도 많다. 세상을 왜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냐고, 같이 더 많은 것을 도전하면 안 되냐고, 내 마음을 같이 느껴달라고 요구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미래를 이야기했다. 세상이 힘들지만 우리가 힘을 합치면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결혼도 할 수 있고, 아이를 낳더라도 잘 키울 거라고 말했다.
내가 미래를 말할 때 온 맘을 다해 진심이었듯, 그도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은 뜨려고 하면 가라앉기만 하는 수영 같다. 잘하려고 할수록, 세상에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 투성이라고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