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으로>를 반복해서 보던 엄마.
이정향 감독의 2002년 영화 <집으로>를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영화 속 주인공은 바쁜 엄마 대신 시골에 사는 할머니에게 맡겨진다. 시골 생활 속에서 할머니와 정을 나누며 성장한다. 주인공과 할머니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성장한다.
나는 <집으로>를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보지 않을 예정이다. 할머니 손에 자란 까닭에 조부모가 나오는 영화를 보면 온 몸이 무거워지고 깊은 슬픔에 잠긴다. 내 목숨 반을 줄여 할머니에게 줄 수만 있다면 억만금을 주고라도 하고 싶다. 슬픔을 막아낼 방법은 없다. 그저 살아계시는 동안 최선을 다해 행복하기로 결심한다. 영화 <집으로> 같은 영화는 내 마음속 취약한 부분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건드린다. 진모영 감독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도 같은 이유로 보지 않았다.
다만 엄마가 <집으로>를 보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의 몸은 힘이 빠져 보였고,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었고, 영화를 반복해서 봤다.
엄마에게 영화를 보지 말라고 했다. 힘이 없고 슬퍼 보여서 싫었다. 그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삶을 복기해본다. 엄마는 스무 살에 상경했다. 대학을 다니고 그 이후는 줄곧 은행에서 일했다. 시댁에서 살며 아이 셋을 낳아 키웠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현관 앞에 딸린 작은 방을 썼다. 엄마 고향은 충북 청양이라 자주 가지 못했다. 갈 수 있는 이유보다 가지 못할 이유가 많았다. 시댁에서 살고 있고 일을 나갔으며 양육을 해야 했다. 엄마는 모든 게 버겁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녀가 버겁다고 말하는 것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이 나에게도 버거웠다.
엄마는 자주 <집으로>를 보고 있었다. 그녀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으니, 실제로는 더 보았을 것이다. 슬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슬퍼 보인다고 여긴 적이 많지 않다. 많이 화가 나거나, 많이 울거나, 많이 무언가를 좋아했다. 감정 결핍보다는 과잉에 가까웠다. 어쩌면 무언가를 애원하는 목소리였을지 모른다. 너무 많이 표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외면했다. 하지만 <집으로>를 볼 때는 마음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허전해 보였다. 감정 과잉보다는 결핍이었다. 그 모습이 생생한 영화처럼 기억된다.
그녀는 위로가 필요했다. 자신이 살아오던 고향을 상실하였다. 그곳에서 돌봄을 제공해주던 주체를 상실했다. 자주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이야기했다. 자신을 돌봐주던 부모님, 오빠, 언니에 대해 말했다. 서울에는 모든 게 없었다. 성인에게도 돌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녀는 영화 속 주인공과 할머니 같은 관계를 원했을 것이다. 사랑을 주고받으며 함께 성숙해가는 관계 말이다. 그녀가 바란 공간은 개발로 점철된 서울이 아니라 본인이 나고자란 시골이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문학이 주는 위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라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고 말한다."(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2018)
영화를 통해 본인의 삶을 위로받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의 삶을 가로지르던 고통을 느낀다.
과거의 아픈 상처가 현재에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