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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Mar 12. 2019

에세이 92.

  오토바이 사고는 치료자를 항상 긴장하게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환자가 젊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안타깝다.  응급실에서 만난 그도 마찬가지였다.  30대 초반의 그는 오토바이 운전 중 차를 피하다가 넘어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슴에 충격을 받았는데, CT를 찍어보니 우측 갈비뼈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부러진 갈비뼈가 간을 치면서 간이 조금 찢어졌다.  간의 찢어진 우측면과 복막 사이의 복강 내 공간에는 피가 조금 고여 있었다.  다행히 활력징후는 정상이었고, 피검사에서는 실혈량이 많지 않아 보였다.  당장의 수술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상황은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었고, 오토바이 사고의 특성상 발견하지 못한 손상이 있을 수도 있어 일단 중환자실로 입실시키고 경과를 관찰했다.  

  그저 오토바이 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했다.  응급실에서 만나는 오토바이 사고 환자들은 많은 경우가 끔찍한 상태였지만, 사실 나도 가끔은 바이크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응급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엔 의식의 소실도 없었고, 다친 정도도 그만하면 심각하지는 않은 정도였다.  게다가 응급실에서 그는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어서, 얌전하게 바이크를 즐기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다.  중환자실에서도 그는 침착한 표정을 계속 보였고, 표정만큼 다친 그의 몸도 차분하게 안정을 유지했다.  새로 발견된 손상도 없었다.  그는 이틀 만에 일반병실로 옮겼고 입원이라는 상황 아래에서 일상의 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안정되면 바로 퇴원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손상이 크지 않은 데다, 젊은 사람 특유의 빠른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회진에서 마주할 때마다 그다지 해 줄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회진 때마다 그의 옆에는 또래의 건장한 남자들이 한둘씩 꼭 있었다.  그리고, 모두 퀵서비스 조끼나 업체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있었다.  문득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퇴원을 고려하고 있던 어느 날 회진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퀵서비스업에 종사하시나요?”

  “예.”. 그의 대답은 짧으면서 왜 물어보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럼 다친 것도 퀵서비스 일 하시다가 다친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혹시 치료비는 업체에서 지급하는 건가요?  아니면 보험에 가입되어 있나요?”

  “아니요.”

  “그럼, 치료비는 모두 본인이 부담하는 거예요?”

  “네, 그래야죠.”. 그의 표정은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그가 담담한 만큼, 내 표정은 점점 의아함에 빠져들었다.

  “업체에서 좀 도와주거나 지원해주지 않나요?  그래야 되는 것 아닌가요?”

  “업체에서 그럴 이유가 없죠.  우리는 다 개인장비 가지고 들어가 일하는 개인사업자들이에요.”

  나의 의아한 표정이 더욱 짙어지자, 그제야 그는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원래 그래요.  당연한 거예요.”   

  지입이라고 했다.  퀵서비스를 포함한 다른 많은 업체들이 이전에는 직원을 고용하여 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부터 업체 경영방식 혁신이라는 미명 하에 전부 해고하고 개인사업자로 만들었다.  퀵서비스의 경우, 업체는 주문을 받아 콜만 연결해주고 수수료를 받아 이득을 챙긴다.  법적으로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직원이었던 사람들이 개인사업자가 되면서, 업체는 이들에 대한 퇴직금이나 의무보험 같은 복지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합법적인 운영방식의 전환이 개개인의 업무와 삶의 질을 낙후시킨 것이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일해야만 하는 처지에 내몰린 사람들은, 특수직 종사자로 산재 대상에 포함시켜달라는 싸움을 국가를 상대로 벌이기도 했었다.  

  내가 마주했던 환자의 현실이 단순히 그만의 특수한 현실이었을까?  정부가 경제규제에서 서서히 손을 놓고 규모의 경제만을 신경 쓰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역시 늘어났다.  지입, 용역, 하청 등등의 구조 하에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점점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렸다.  굳이 이랜드 노조나 기륭전자, 콜트콜텍, 동희오토 등의 잘 알려진 싸움을 언급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마트 계산대에 잠시라도 앉을 의자 하나 놓고, 대학 청소담당 직원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기까지, 복잡해진 고용과 노동구조 안에서 힘들게 싸울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의 환경에서 최소한의 임금으로 노동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자본은 이득을 챙긴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인간을 소외시킨다.  인간을 위한 노동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도록 만들기 위한 싸움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마주한 환자의 현실은, 사실 내 주변 거의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현실에 가까웠다.  

  그런데, 나의 고민은 그의 당연하다는 말 한마디에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를 그처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부당한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점점 더 극단으로 향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에서 사람들의 의식은 극단의 흐름 위에 편승한다.  자본이라는 현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재되었다.  그들에게 한없이 불리하게 짜인 틀 안에서, 그것이 합법적이라는 이유로 그저 받아들인다.  혹여 그처럼 일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신의 실수로 운 나쁘게 당한 것이라 자책할 뿐이다.  방송에서 나오는 고공철탑의 싸움과, 삼보일배의 고통과, 단식의 끈질김은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공감 못할 사람들의 고집일 뿐이다.  늦은 밤 주문에 배달 오토바이를 달리다 사고로 죽은 누군가의 안타까움은 나의 현실이 아니기에 다행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처지에 놓은 수많은 자신들에 그다지 공감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이유 없이 오르는 물가에 잠깐 화를 내다가, 쉬는 날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에 가서 편안하게 사고 싶은 물건을 한 가득 카트에 담으며 편안하게 만족을 느끼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 현실 안에서 내가 그의 앞에서 보였던 의아한 표정은, 그와 병문안을 온 퀵서비스 동료들의 당연하다는 웃음과 표정에 뒤덮여버렸다.  

  하청에 의한 안전불감증과 부실이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나고, 젊은 노동자 몇몇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환자로 만났던 세월호에서 구조된 트럭기사는, 지입 하에 개인사업자로 등록하여 새 트럭을 사서 운행한 지 3개월 만에 진도 앞바다에 자신의 트럭을 수장시켜버렸다.  우리는 서서히 이 구조가 얼마나 위험하고 부실하며 노동자들을 극단으로 내몰고 있는지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개선하기 위해 싸우는 이들은 소수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만족과 편리만을 생각하며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다.  종합병원에서만 그런 처지의 환자들을 만나는 게 아니다.  자리를 옮긴 작은 병원에서도, 보호받지 못한 채 자신의 시간과 자비를 들여 내 앞에 앉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그리고 여전하게도, 자신의 힘듬이 잘못된 노동환경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픈 무릎을 주먹으로 툭툭 치면서, 부실한 몸 탓을 하면서, 그래도 일은 나가야 한다고 나에게 호소할 뿐이다.  먹고사니즘의 숭고함이라고 말하기에는 이상하고, 바라만 볼 수밖에 없어 애매하다.  의아한 표정은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의 자리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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