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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Q May 26. 2024

상처는 측정의 영역이 아니라, 감당의 영역이니까.

그러던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설사 그 모든 게 엄마 탓이 맞다고 해도, 이 긴 인생에서 내가 언제까지 누굴 탓하고만 살아야 할까. 내가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이렇게 나를 방치한다면 그건 결국 누구의 손해일까.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中-



겨우내 쌓였던 눈이 갑자기 풀린 날씨 탓에 곳곳에 진흙탕을 만들며 녹고 있었다. 엄마는 평소엔 입지 않던 고운 옷을 차려입고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시간차(하루에 서너번 다니던 시골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딘 내 발걸음을 재촉했었다. 나는 성큼성큼 가는 엄마 손에 거의 끌려가다시피했다. 여섯 살이나 많은 형에게 물려받은 패딩 점퍼는 너무 크고 길어서 바닥에 닿을락말락할 정도였다. 걷는 것조차 불편했던 나는 결국 눈이 녹아 생긴 흙탕물 위로 철퍼덕 하고 자빠지고 말았다. 엄마는 소리를 질렀고, 나는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했다. 엄마는 날 집으로 보내고 혼자 시간차를 타러 갔는지, 아니면 나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다음 차를 기다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날의 엄마 표정과 말투와 서러운 감정만 남아있다. 내 나이 여섯 살 때 기억이다. 



잠이 설피들었었다. 그 흔한 슈퍼마켓 하나 없던 동네여서 과자 하나 구경하는 것도 쉽지 않는 시절이었다. 엄마가 아빠에게 이야기했다. "이건 우리 정규를 줘야하니까 찬장에 넣어둬요." 다음날 찬장에서 찾아낸 것은 오징어땅콩이었다. 


어릴 때 입은 상처는 그것이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생채기일지라도, 평생을 괴롭히곤 한다. 난 최근까지 그날의 기억들이 꿈에 나왔었다. 


그래, 이런 건 상처받을만한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 상처가 되지 않는 일은 없다. 상처는 대부분 '주는 것이 아니고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받는 사람에 의해 무엇이든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지면에 쓰지못할 더한 일들이 있었다. 당신이 받은 상처 또한 감히 상상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상처의 경중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측정의 영역이 아니라 감당의 영역이다. 아무리 작은 상처도 감당하지 못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방치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어느날 명절이 되어, 엄마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상처의 에피소드를 털어놓았다. 엄마는 기억하지 못하지도 못하는 사소한 상처들을 말로 풀어내고서야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그것은 원망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방치로부터의 해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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