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을 나설 때 아버지께서
"들어올 때 맛있는 거 사와라."
...라고 하셔서 상당히 긴장되었다.
'난, 집순이라 집밥만 먹는데 '맛있는 거'? 뭐가 있지?'
108번뇌가 번개처럼 번쩍 뇌를 때리더니,
곧 평화가 다가왔다.
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렸달까.
분명 전에 햄버거를 사들고 들어갔을 때,
"나도 매운 맛 버거 잘 먹을 줄 아는데..."
...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뭔가 커플템처럼 커플로 똑같이 새우 버거를 부모님 몫으로,
내 몫으로는 스파이시 버거를 사 왔었다.
어머니는 입맛에 잘 맞으시는데,
아버지는 느끼하셨던지 나 들으라고 정확하게 위와 같이,
"매운맛 버거 먹을 줄 아는데..."
...라고 하신 거다.
그 말씀 자체가 다음엔 매운맛 버거를 부탁한다는 심중의 언어셨고,
오늘 뭘 사 오라고 하시니...
'오호라~ 그 '다음'이 오늘이구나, 그럼, 햄버거구나~.'
볼일을 보고 돌아오니 얼추 점심 시간,
세트 메뉴로 3개를 포장 주문,
바리바리 들고 집에 오는 것도 일이더라.
2
맛있게 스파이시 햄버거로 한 끼를 드시고 아버지는
"거하게 사줘서 고마워."
...라고 하셨는데, 나는 쓴 웃음 지었다.
계산하려니 마침 아버지 카드가 있길래, 그걸로 결제,
아버지 폰에 내역이 안 떴을 리 없는데,
능청스레 '사줘서'라고...ㅎㅎㅎ
순진하게 '사 가져와서'가 바른 표현이라고 고쳐드리려다
멈칫했다. 휴우~ 하마터면 아부지한테 말려들 뻔.
3
햄버거 세트 메뉴를 구입한 건, 프렌치프라이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햄버거보다 그걸 더 좋아하신다.
물론 햄버거도 잘 드시지만 프렌치프라이를 드리면
틈틈이 주전부리로 잘 드시기 때문이다.
"어머니 때문에 세트 산 거예요. 프렌치프라이 드시라고."
...라고 하니 어머니가 그냥 듣고 계신다.
감동은 말한 순간에 오는 게 아니다.
어머니께서 나중에 프렌치프라이 집어 들고 한 입 드실 때
'아, 우리 딸이 나를 위해서! 이걸 사 왔어?'
...라는 부지불식간에 흘러드는 감동을 드리기 위해,
말한 순간 침묵의 무반응은 감내해야 한다.
후후~ 다년간의 긴축재정 시절을 겪고 있다 보니,
효도도 지능적으로!
말은 예쁘게! 비용은 아버지 카드로!
프렌치프라이도 효도꺼리가 되느냐고?
평소에 효 자체가 아예 없었으면 가능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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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자고 하는 글이다.
4
저녁을 먹는데 반찬으로 감자 볶음이 나왔다.
우리 집에 감자가 풍년일세, 감자 볶음에 프렌치 프라이에...
결이 같은 먹거리가 많으면... 내 지능적 효도의 가치가 반감되는뎅.
덴장, 만회하려면... 아부지 카드를 언제 다시 손에 쥘 수 있지?
내 카드는 그립감이 안 좋아서 사용을 못하겠어서리...
아부지 카드 그립감 짱.
어머니도 그 그립감을 아셔서 내게서 가져가셨다.
덴장.... 벌써 손맛이... 그립감... 그립군.
5
하루가 저물어 간다.
10월도 하반기로 치닫고 있고,
계절도 급박해진다.
그저 나는... '천천히 꾸준히 한결같이...'이련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