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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호 Nov 18. 2024

지구 별 겨울 구역의 하루

더운 나라에 출장을 다녀오면 지구란 별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단 몇 시간을 비행기로 움직였을 뿐인데 기온이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었다. 어젯밤 베트남에서 돌아온 비행기에서 내리니 떠날 때 초가을이던 날씨가 이미 초겨울의 날씨다. 단 닷새만의 변화 치고는 드라마틱하다. 떠나는 날 아침 가을의 멋이라고 두르고 나와 가방 속에 처박아 놓았던 얇은 머플러로 목을 단단히 감싸고 입고 있던 반팔 폴로티 위에 와이셔츠를 덫 입었다. 여름 양복은 아무래도 추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맵시 있는 옷차림 대신 체온을 지켰다.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집 앞으로 가는 공항버스가 아직 있어 다행이었다. 안국동은 외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동네라 적지 않은 외국인들이 버스에 올랐다. 웰컴투 코리아. 차가 막히지 않는 시간이어서 버스는 금세 집 앞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려 출장에 가져갔던 큰 가방 두 개와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일어나 사무실에 가져다 놓아야 하는 큰 가방 두 개를 끌고 집을 나섰다. 은행나무의 낙엽들이 노란 금화처럼 사방에 떨어져 있구나 하는 데 인도 한가운데 누군가 황금색 은행잎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다. 나는 오늘 횡재할 조짐이라 생각하며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린 왕자> 안에는 별을 세는 사업가 이야기가 나온다. 철새를 타고 소행성 B612를 떠나 닿은 네 번째 별이다. 사업가는 아무도 소유하지 않는 별들을 소유하는 법을 가장 먼저 생각해 내었다. 그는 별들을 세어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는 54년째 별을 세고 있다. 별들의 센 숫자를 종이에 적고 그 종이를 서랍(은행)에 넣어 '소유'한다. 그는 별들을 세고 다시 세고 또 세어 관리한다. 그는 그의 말대로 참 '성실한 사람'이지만 어린 왕자의 말대로 참 '이상한 사람'이다.  


소유라는 것이 세고 적어서 은행에 맡기는 것, 그냥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눈앞의 황금빛 은행잎들을 세고 또 세어 '소유'하면 어떻까. 그냥 숫자를 세어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별을 세는 것과 은행잎을 세는 것과 쓰임이 없는 돈을 세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도 따 줄 수 없는 별들과 먹을 수 없는 은행잎처럼 담박한 삶 이상의 넘치는 돈을 모으고 세고 가지고  있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지나치게 성실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린 왕자는 사업가 별을 떠나며 '가진다는 것'에 깔끔한 정의를 내려 준다.   


"나에겐" 그가 또 말했다. "꽃이 하나 있는데 매일 물을 주지. 나에겐 세 개의 화산이 있는데 주말마다 소제를 해. 사화산까지도 소제해 주지. 알 수 없으니까. 내가 화산들과 꽃을 갖고 있다는 건 그들에게 이로운 거야. 하지만 아저씬 별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네." - <어린 왕자>, 생텍쥐베리 저, 김현 옮김


가진다는 것은 그들에게 이롭게 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가졌는 가? 나는 나의 몸을 가지고, 가족을 가지고, 친구를 가지고, 회사를 가지고, 마을을 가지고, 나라를 가지고... 나는 내가 가진 수많은 이들에게 어떤 이로움이 되고 있는가.


가방을 사무실에 올려놓고 다시 내려와 근처 커피점에서 따뜻한 커피를 샀다. 아주 더웠던 여름에는 나도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지만 날씨가 조금 선선해지고부터는 따뜻한 커피를 마신다. 나같이 이십여 년 전에 중국에 살아 본 사람들은 그 당시 중국에서 여름에도 뜨슨 맥주를 먹고 따슨 차를 들이키며 지냈다. 차가운 음식을 멀리하는 중국에서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란 몸을 상하는 짓이란 생각이 있다. 찬 맥주를 몇 잔 들이켜면 이내 배가 아파 오는 나는 이 생각에 동감한다. 뜨슨 맥주는 좀 너무했었다란 생각이 들지만 커피는 역시 따순 것이 맛도 향도 더 낫다.  


전시에서 만난 업체들과 연락을 하고 이메일을 쓰고 동시에 내일모레 다시 있을 전시의 준비를 하느라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다. 벗과 사무실을 나와 설레설레 걷다가 자연스럽게 손만두집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사골 국물에 만두와 칼국수가 들어간 '칼만둣국'을 주문했다. 뜨슨 국물이 당기는 그런 계절이 온 것이다. 조금 더 겨울이 깊어지고 정말 얼어 죽지 않으려면 얼죽아 족도 이내 따순 아메리카노를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어디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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