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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May 07. 2018

일상을 소홀히 할 순 없지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Like Father Like Son, 2013

어버이 날이다, 매해 이 날을 마주할 때마다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그래 봤자 고작 얇은 봉투를 내밀며 멋쩍은 효도를 흉내내는 것뿐이다. 늘 미덥지 못한 얼굴로 두 분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이 어색하다. 일 년에 한 번 효자 역할을 맡기엔 내 얼굴이 두텁지 못하다. 두 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짧은 인생에 그들이 미쳤던 무수한 보살핌을 떠올린다. 부디 크게 맘쓰는 일 없이 오랫동안 내 곁에 있어주시길 바랄 뿐이다.

91년작 <신부의 아버지>는 동명의 1950년작의 리메이크작이다. 각본, 연출은 헐리웃의 로코와 가족영화 제작으로 유명한 낸시 마이어스와 챨스 샤이어 콤비가 맡았다.

어제는 지방에 결혼식을 다녀왔다. 어렵사리 시간 맞춰 도착한 호텔 예식장에서 못지않게 얇은 봉투를 내밀고 식권과 주차쿠폰을 받는다. 휘황 찬란한 식장 안에서 매번 같은 레퍼토리의 예식을 구경한다. 짝다리를 짚고 선 나는 사회자의 민망한 멘트와 오그라드는 축가에 비실비실 웃음을 머금는다. 예측 가능한 감정들이 넘실거리는 이 행사를 난 백 번 이상은 보아왔던가. 주말이면 빼곡한 일정으로 식을 진행하는 예식장 풍경이 기시감을 부른다. 그 곁에 분주한 직원들은 업무용 미소로 식의 진행을 서두른다. 누군가에겐 인생의 큰 변곡점일 단 하나뿐인 결혼이 그들에겐 매주 마주해야 하는 업이다. 조금은 식어버린 가슴으로 자신의 일을 마주하는 그들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주말마다 무수한 부부들이 자동화 공정의 생산라인처럼 차질 없이 영원한 사랑의 서약을 맺는다. 그 대열에서 멀찍이 떨어져 선 나는 삼 할의 염세와 칠 할의 관조로 그들을 바라본다. 부디 잘 살길 바랄게.

냉담한 아버지 역을 맡은 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일본의 장돈건 쯤 되는 배우다. 아내 역의 오노 마치코는 잘 모르는 배우였지만, 영화를 보다 사랑에 빠졌다. 이상형이야.

식이 끝나갈 즈음 슬슬 지겨워지던 차, 피로연 장으로 향하는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신부 어머님의 눈물이었다. 보기 드물게 서글프게 우시는 데 맘이 짠하더라. 늘 신부 측의 어머니만 우신다. 수많은 결혼식을 가봤지만 시어머니가 우는 건 보지 못했다. 거의 대부분의 친정어머니만 눈물을 훔친다. 아직도 신부에게만 출가외인이라는 태그가 붙는걸까. 그건 한국 유교문화의 관성적인 양태로 봐야 하나. 아니면 여자와 여자 사이에 맺어진 모녀간의 정서라는 게 있는걸까. 그 옆에서 무표정으로 앉아 계신 친정아버지는 멀리 허공만 응시한다. 물론 속마음은 못지않게 복잡하시겠지. 그런 생각도 잠시 무수한 인파의 등에 떠밀려 유유히 뷔페식 만찬장에 들어선 나. 내 잔치국수는 어디에 있는가.


어릴 적 <신부의 아버지>(1991)라는 영화를 좋아했다. 전형적인 가족영화인 이 작품에서 아버지 역할을 맡은 ‘스티브 마틴’의 연기를 기억한다. 착잡함과 불만, 안타까움, 분노 등이 복잡하게 얽힌 딸 가진 아비의 마음을 코믹하게 표현했다. 애지중지 키운 22살 외동딸을 갑작스럽게 외간 남자에게 뺏기는 기분은 어떤 걸까. 그 당시의 아버지상은 가정과 자녀 양육의 책임은 어머니에게 맡기고 멀찍이 떨어져서 바깥일을 관장하는 존재로 한정되었다. 요즘 영화들에서는 어머니 이상으로 친밀한 존재로서 아버지가 등장하기도 한지만, 현실의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역할과 자리에 대해 고민하는 바가 없지 않다. 가까운 예로 병원에서 아이가 바뀌었다는 설정을 가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있다.

여전히 특유의 중얼중얼 화법으로 농을 거내는 우리 할머니, 키키 키린

료타는 능력 있는 부자 아빠의 전형이다. 아들 케이타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그가 택한 것은 윤택한 환경과 엄격하게 규칙을 적용하는 교육이다. 그렇게 6년 간 공들여 키운 아들이 출산 과정에서 뒤바뀐 것이다. 하루아침에 내 아들이 내 핏줄이 아니라는 통보를 받은 료타는 잠시 운전석에 앉아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리고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한다. "역시나 그랬었어. 이제 이해가 됐어." 이게 무슨 말인가. 평소 자신의 지도방침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아들에게 의구심을 가졌던 료타는 이번 계기를 통해 자신의 '진짜' 아들을 찾고자 한다. 천청벽력의 소식 앞에서 절망하는 아내와 달리 료타는 침착하고 냉정하다. 그가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진짜 아들을 찾는 시점부터 영화는 복잡해진다. 자신이 육 년 동안이나 키워온 아들은 '가짜' 아들이 된 건가. 그런 의구심도 잠시 영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결국 서로의 아이를 돌려받는 것으로 합의를 본 두 집안은 잠시간의 유예기간을 갖기로 한다. 아이들의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서로의 집을 오고 가며 아이들의 적응을 돕는다. 이 과정에서 료타와 대조적인 가짜 아들의 아버지 ‘유다이’가 등장한다. 료타와 같은 경제적 능력은 없지만 시간이 많고 가정적인 사람이다. 같이 목욕을 하고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의 틈바구니를 파고들어 마음을 얻어내기도 한다. 그는 규칙과 성취를 강조하는 료타와 정 반대로 아이들에게 관대함과 시간을 선물한다.

도대체 이 아저씨는 어디서 나타난거야. 라디오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작사/곡 까지 두루두루 한다는 이 예술가에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빠져 버렸음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은 딜레마 앞에 멈춰 선 인간을 다루고 있다. 서서 숨을 고르고 곰곰이 생각해봐도 결론에 다다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삶이다. 감독의 세심한 관찰력은 그 순간에 위력을 발휘한다.  

“‘병원에서 아이가 뒤바뀐다’는 선정적인 사건을 플롯에 넣으면 관객의 시선과 의식은 아마 ‘부부가 어느 아이를 선택할까’라는 질문 쪽으로 향할 것이다. 그러나 그쪽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힘이 너무 강하면, 그 이면에서 숨 쉬게 마련인 그들의 ‘일상’이 소홀해진다. 그래선 안 된다. 끝까지 일상을 풍성하게, 생생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수필 <걷는 듯 천천히 중>

아이들의 일상 안에서 머무는 아버지의 존재를 비춤으로 해서 부성이 자리하는 곳을 의식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누군가의 가정을 목격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아버지자 집에서 머무르는 자리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한다. 목욕을 마치고 아이의 머리를 어떤 식으로 말려줄까. 침대 위에 어떤 순서로 나란히 누워, 어떤 식으로 손을 잡을까. 이런 세심하 관찰을 통해 가장으로서의 아비가 아닌, 생활 속의 아버지를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언뜻 봐도 일상에서 볼 수 있을 듯한 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진짜 아버지라는 것이 과연 핏줄과 관련지을 수 있는지 묻는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중대한 딜레마 앞에서 비교적 쉬운 답을 내놓는다. 영화는 극적인 설정으로 ‘낳은 정, 길은 정’ 얘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귀 기울여 이야기를 들어보면 방점은 시대의 아버지상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와 한 몸이었다가 분리되는 모성과는 달리 부성이라는 것은 늘 거리감을 전재로 한다. 그 거리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아버지상에 머무르는 남자는 아버지가 되지 못한다. 특히 여전히 핏줄을 운운하며 일상과 시간을 등한시하는 가족들을 경계한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어릴 적에 읽었던 한 자기개발서의 제목이 떠올랐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천박한 제목을 단 이 책은 당시 무척 많이 팔렸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책의 홍보문구가 제목보다도 더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부를 얻을 수 있는 비밀을 얻을 수 있을뿐더러, 가난한 아버지에서 벗어나 돈 많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광고였다.(이런 비슷한 광고로 많은 이들에게 사기를 쳤던 책이 희대의 개소리라 불리는 <시크릿>이다) 책에서 말하는 부자가 되는 비법이라는 것이 간사하고 조악하다. 구체적인 방법론도 없이 적은 돈이라도 투자해서 사업을 해서 성공하라고 헛소리를 늘어놓는다. 사실 이보다 더 날 분노케 했던 내용은 아버지가 가난하면 가족에게 어떤 방식으로 무시당하는지 말하는 방식이었다. 아버지가 능력이 없으면 노년에 자식에게 잊히고, 결국엔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다인 것처럼 말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명백한 모욕이다. 저자는 자본주의 시대의 아버지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까. 정말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걸까. 이 책의 저자가 일본계 미국인이던데, 기타노 다케시나 마루야마 겐지에게 걸렸으면 등이 터질 때까지 등짝을 맞았을 거다. 확실한 건 아버지는 날 그런 세상에서 키우지 않았다는 거다.

사진 잘 나왔네요, 감독님

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부산영화제에서 봤다. 그것도 아역 배우들과 감독님이 모두 참석한 GV를 새벽부터 줄을 서서 예매했다. 영화의 전당의 이층 구석 좌석에서 쏟아지는 플래시 앞에 쑥스럽게 움츠리던 감독님이 생각난다. 비가 오는 날이어서 극장의 공기는 눅눅하고, 난 새벽부터 표를 구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해 하품이 나왔다. 그래도 극장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상치 않은 영화를 본 감흥에 젖어 감독님과 배우들을 환대했다. 지구를 먼지로 만들어버리는 영화가 전국 대부분의 상영관을 잠식하는 이곳에서 아버지의 의미를 찾으려는 어수룩한 남자를 반겼다. 낡은 단어에 먼지를 털어내고, 곡진한 문장을 새겨 넣은 영화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잊고 살았던 것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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