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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Jul 07. 2018

모든 것을 잃기 이전에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월드컵이라는 스펙터클

   

어쨌거나 저쨌거나 월드컵은 월드컵이다. 밤 11시만 되면 자연스레 내 의식은 저 먼 러시아 땅으로 향한다. 광활한 대초원을 달리는 안나 카레니나의 기개처럼, 내 의식은 낯선 도시의 축구장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후회로 얼룩질 아침의 눈꺼풀은 잠시 잊도록 하자. TV가 없는 난 침대에 누워 잠이 들기 전 스마트 폰 화면으로 선수들과 만난다. 둥근 공을 사이에 두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선수들에겐 순수한 자긍심이 느껴진다. 국가를 대표하여 전사의 감투를 쓰고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이 공놀이가 뭐라고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포효를 하고, 격한 감정을 감추지 못해 기행을 저지르는 걸까. 근육의 부딪침과 순간적인 속도 그리고 절박한 얼굴의 일그러짐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기민함도 놀랍다. 세계의 방송사들은 갖가지 장비를 동원하여 그 어떤 영화에서도 목격할 수 없는 감정적 동요를 그려낸다. 말 그대로 각본이 없는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월드컵도 영화와 다르지 않다. 여기 훌륭한 배우가 있다.(참을 수 없는 고통의 가벼움)

과거 어느 술자리에서 내 친구는 늘 올림픽에서 매달을 따면서도 언제나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을 국민 스포츠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한참을 떠들어댔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선수의 땀방울을 잡아내고, 부감으로 경기장을 훑은 다음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을 깔아주고 중계진의 절박한 신음소리를 넣어주면 핸드볼이 세계 최고의 흥행 거리가 될 거야”라고 했다. 듣고 보니 헛소리는 아니다, 아니 일리가 있긴 하다. 월드컵 TV 중계를 보다 보면 그 재미가 실은 영화적 기법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미리 짜인 것이 아니라 더 긴박감이 있고, 제한된 시간과 엄격한 룰 덕분에 숨이 거칠어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전반전이 끝났다. “그래 잠은 매일 자잖아” 오늘은 집어치우고 더벅머리 소년들과 밤을 보내야겠어. 몸을 곧추 세우고 축구 중계를 즐기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텅 빈 배가 아우성친다. 주위를 둘러봐도 나 혼자 뿐이고, 내 방에 있는 음식이라곤 라면 한 봉지와 달걀 3개뿐이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 할지라도 불쌍한 눈으로 주방을 둘러보면 뭔가를 꺼내 주시던 어머니가 그립다. 중학교 시절부터 난 늘 혼자 라면을 먹곤 했다. 맞벌이하시던 엄마는 내가 배고플까 늘 밥과 반찬을 차려놓고 출근하셨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 손은 라면 봉지를 뜯곤 했다. 텅 빈 집을 들어설 때의 어둑한 거실과 하염없는 침묵에 심통이 난 걸까. 자그맣게 오려진 광고전단에 휘갈겨 쓴 어머니의 메모를 읽으며 정성스런 제육볶음을 외면했다. 그럴 땐 김치를 거실 바닥에 놓고 성의 없이 끓인 라면을 먹으며 TV를 봤다. 6시만 되면 프로야구 중계를 하니까 조금만 참자. 정적의 거실을 밝혀주는 한화 선수들의 붉은 유니폼을 보는 것도 잠시, 난 소파에 누워 어김없이 잠이 든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     


얼마 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결과를 보고 미지근한 기쁨을 느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수상하길 기대했지만, 아침 포털 뉴스란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밝은 얼굴이 날 맞았다. 역시 모든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사실 수상작 <어느 가족>(18년 7월 개봉 예정)은 <버닝>이 받지 못한다면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난 고감독의 팬이니까. 몇 주 전 우연찮게 서점을 둘러보다가 고감독이 집필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의 영화처럼 수수하고 단출한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수상 결과를 보자마자 이 책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중, 내가 사랑하는 키키 키린 할머니

작년에도 그의 수필 <걷는 듯 천천히>를 읽은 경험이 있다. 심심한 맛에 읽을 수 있다는 지인의 추천에 읽었지만, 너무 심심한 탓에 실망했던 기억이 있어 구매를 망설였다.(늘 망설이지만 사고야 만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책의 굵기와 내용 면에서 인간 고감독의 생각과 예술관을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 고감독이 아마추어 시절부터 TV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연출하는 중에 생각한 것들이 빼곡하다. 각종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생각을 듣고 난 소회뿐만이 아니라, 이런 시절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기억의 조각들을 들을 수 있다.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이 사고체계를 전부 쏟아부은 결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어쩌면 한 인간이라는 우주를 쏟아놓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가 재미있게 본 영화와 좋아하는 예술가, 각 영화제를 돌아다니며 떠오른 추억들을 들으며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행성을 거닐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와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어머니가 즐겨 듣던 노래를 대사와 제목으로 차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어머니(대부분 키키 키린 배우)가 등장하는 신에 실제 고감독의 돌아가신 모친과 겪은 추억을 대사에 녹였다고 고백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영화 속에 반영할 때, 그는 스스로 영화와 인생을 이어주는 끈을 떠올린다. 누군가와 완전한 이별이 불가능하듯, 인간의 머릿속에 담긴 기억이란 미련이 남으면 미처 휘발되지 않고 자리한다. 그는 영화를 통해 죽은 어머니와 작별 의식을 치른다. 이에 그치지 않고 어떨 때는 그 어머니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한다. 죽은 자가 산자를 지켜보고, 남겨진 자들은 그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둠의 시간 속에서 회한에 얼룩진 삶을 보내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어느 한순간으로 가고 싶지만 늘 기억 앞에서 주저앉는 사람이 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내가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유를 한 가지 더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런 얘기를 했을 텐데, 나는 네 편이라고, 너를 외롭고 아프게 하지 않겠다고 말할 텐데.

      

많은 이들이 고감독의 영화적 자산을 자국의 전설적인 거장인 ‘오즈 야스지로’에서 찾는 경우가 많다. 특히 <동경이야기>(1953)을 보다 보면 더욱 그런 마음이 든다. 하지만 고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감독으로 대만 감독인 '에드워드 양'과 '허우 샤오시엔'을 꼽는다. 늘 명성으로만 듣던 <하나 그리고 둘>이나 <고량가 소년 살인사건>, <비정성시> 같은 작품들을 보지 못한 나는 그의 칭송에 조바심이 났다. 그 좋은 걸 나만 못 봤단 말이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감독 에드워드 양     


오 세상에 ‘에드워드 양’의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니. <고량가 소년 살인사건>을 드디어 영화관에서 보았다. 이제 어디 가서 ‘에드워드 양’ 영화를 극장에서 본 추억으로 너스레를 떨 수 있다.(아마 내일이면 <하나 그리고 둘>을 보고 으쓱해 할 것이다.) 과거의 클래식을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다. 그건 시네마 테크에서 몇몇 매니아들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다. 과거를 불러들여 추억하길 주저하지 않는 이 도시가 지닌 빛과 같다. 지구를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블록버스터의 틈에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90년대 중반에 에드워드 양 감독의 영화가 정식 수입되고, 개봉 계획이 잡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극장의 입김이 쌨던 그 시절, 4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상업적 측면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마치 대만이라는 국가와 한국이 처한 딜레마처럼(중국과의 우호적 관계 유지를 위한 국고 단절)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도시는 이제 그 모든 눈치 없이, 다양한 문화를 옹호하는 사람에 둘러 쌓여 예술을 논한다. 조금 오버해도 이해해달라, 난 오늘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영화를 보는 중 쉬는 시간을 가졌다. 4시간에 가까운 영화이다 보니 절반의 상영 후 극장은 잠시 불을 밝혔다. 막간에 화장실을 다녀오는 분도 있고, 담배를 태우러 가는 사람도 보였다. 과거에 헝가리 ‘벨라 타르’ 감독의 <사탄 탱고>를 7시간에 걸쳐 본 기억이 있다. 이것이 삶의 무거움인가를 실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엉덩이에 땀이 차고, 좀이 쑤셔도 그저 다 보았다. 마치 영화를 내 의식으로 흘려보내는 기분이 들었다. 난 엉덩이로도 영화를 볼 수 있구나를 실감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이야기의 전개라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각 위치에서 삶을 사는 인물들이 있지만, 영화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다. 마치 연출의 개입이 부재한 것처럼 정적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한 소년이 소녀를 찔러 죽일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본 것일까. 아마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의 디테일이 있을 뿐이겠지. 삶이란 인과관계로 재단될 리 없고, 아무리 영화를 잘 만들어도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영화를 영화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지극히 반어적이면서도 통렬하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대만이 처한 역사적 위기상황, 그 시대의 공기를 최대한 현현하게 재현하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오랜 응시와 기다림은 그 무용함의 증거다. 동네 어구의 허름한 집, 작은 방에도 자신의 삶을 고민하는 한 소녀, 누군가를 술을 마시고 떠들며 한 소년은 침대 위에서 일기를 적는다. 영화는 그저 그들의 공간에 자그마한 랜턴을 들이밀어 속삭임을 유도한다.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할 줄 모르는 소년은 사랑하는 소녀 앞에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자기주장을 하지 못해 남들에겐 그저 무난한 녀석으로 보였지만, 실은 그 자신이 내뱉지 못한 말에 갇혀 전전긍긍한다. 난 그것이 에드워드 양과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잇는 끈으로 느꼈다. 조용하고 정적인 그들의 속에 끓고있는 감정의 끈이 팽팽하다. 소년은 둥그렇고 부드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며 애꿎은 땅에 발을 비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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