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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진 Nov 22. 2018

유폐된 시간의 유령들

저니스 엔드, Journey's End, 2017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프랑스 북부의 한 도시, 연합군 소속의 영국군과 독일군이 대치한다. 양국은 서로 참호에서 돌격할 수도 나갈 수도 없었던 4년간의 소모전을 진행 중이다. 영화는 이 시기에 최전선에 자리한 한 중대를 비춘다. 독일군의 포격이 곧 재개되리라는 소문이 파다한 가운데 대위 스탠호프가 중대장으로 있는 C중대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 오랜 전투로 정신적 상흔을 입은 군인들의 일그러진 얼굴은 별다른 스펙터클 없이도 전쟁을 각인시킨다. 촬영의 대부분은 중대의 장교들이 위치한 참호에서 이루어진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작품답게 힘을 준 대사들이 핏발 선 눈을 가로지른다.     

영화 저니스 엔드, 스탠호프 역을 맡은 '샘 클라플린'

지휘관 스탠호프의 오랜 지인이 부대로 전입하면서 극의 긴장이 높아진다. 영국은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많아지자 이제 갓 성인이 된 햇병아리까지 장교로 임관시켜 전장에 보낸다. 오랜 친구이자 누나의 애인이기도 한 스탠호프를 마주한 롤리는 빙긋 웃어 보인다. 롤리는 스탠호프가 입대하면 찾아오라고 했던 걸 잊지 않았던 것이다. 스탠호프는 앳된 얼굴과 아직은 맑은 눈을 가진 롤리의 출현이 반갑지 않다. 롤리는 어렵사리 여기까지 왔는데 자신을 냉대하는 스탠호프를 이해할 수 없다.

스탠호프는 어렵사리 받은 지난 휴가에도 애인인 롤리의 누나를 찾지 못했다. 긴 전쟁이 자신을 괴물로 만들었으며, 뭔가를 상실한 느낌에 견딜 수 없다. 눈 앞에 나타난 롤리는 부끄러운 자신을 자각하게 하는 불편한 존재다.


불편한 재회

 

스탠호프는 오랜 시간 동안 환각증세로 인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다. 상부에서는 며칠 안에 독일군의 공습이 있을 거라고 압박하고, 부대원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져 있다. 그런 상황에 골치 아픈 풋내기까지 왔으니 머리는 더 복잡하다. 스탠호프는 지금 이대로 전쟁이 시작되면 잠시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걸 잘 안다.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이런 복합적인 요인으로 스탠호프는 틈만 나면 위스키를 들이켠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벌컥벌컥. 그는 만취한 상태가 되어서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는 부하들의 속은 타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환각에 휩싸인 스탠호프는 온 몸에서 벌레가 기어나오는 환각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문제가 있는 건 스탠호프뿐만이 아니다. 참호 바닥에 주저앉은 부대원들은 저마다 전쟁에서 의지할 무언가를 쥐고있다. 소위 롤리는 자신을 기다릴 누나를 그리며 편지를 쓴다. 롤리에게 몇 해 전 따스한 봄날의 기억은 이 혹독한 시간들을 버틸 수 있는 외딴 방이다. 중위 트로터는 배급받는 음식에 지나치게 집착하여 돼지가 된다. 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롤라 아줌마처럼 음식을 친구 삼아 군살을 가족 삼아 버틴다. 옆에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히버트 역시 신경증을 앓아 모르핀이 절실하다. 정상이 아닌 듯 보이지만, 전쟁에 멀쩡한 얼굴이 가당키나 한가. 영화가 말하는 전쟁이란 비정상의 소굴에서 지난날을 떠올리는 소모전이다.     

영화 저니스 엔드, 반가운 얼굴 '폴 베타니', 어려운 배역인 오스본 중위로 열연했다

극 중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는 오스본 중위뿐이다. 비교적 나이 많은 럭비코치 출신의 이 남자는 인간적인 면모를 발휘해 부대원들과 교감한다. 그 역시 지속적으로 담배를 피우며 초조한 모습을 드러내지만 눈빛은 고요하다. 오스본은 말한다. 이 전쟁이 지긋지긋하지만 자신은 충분히 살았으니 아쉬울 게 없다고. 그저 창창한 나이에 인생을 저버릴 젊은 친구들을 보며 탄식할 뿐이다. 이후 상부는 갑작스럽게 오스본이 정상에 가깝다는 이유로 기습작전에 투입한다. 열 명의 부대원과 게릴라전에 나선 그는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미쳐있지 않은 이가 가장 먼저 희생되는 전쟁의 아이러니다. 오스본에게 심리적으로 의지했던 부대원들은 점차 광기에 휩싸인다.      


그들이 유폐된 시간을 버터내는 방법


먹는 행위가 유폐된 시간을 사는 유령들에게 힘이 된다는 건 이제 클리셰에 가깝다. 영화는 별다른 대화 없이도 뜨끈한 차와 빵조각을 먹는 이들을 바라본다. 음악도 없고 포격도 없다. 하루의 아늑한 시간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대지의 새들은 고요를 등지고 날아가고, 날 선 동요도 이 시간만큼은 아랑곳 않는다. 그저 형편없는 수프를 후후 불어 마시며 몸을 녹인다. 저녁을 안 먹고 영화관에 들어선 나는 다소 민망한 눈으로 그들의 식사를 구경했다. 영화관엔 팝콘과 버터 오징어 냄새가 진동하고, 그들의 식사는 끝날 줄 모른다. 대체 참호 속에서 먹는 살구 맛이란 어떤 걸까. 저 수프엔 뭘 넣었길래 건더기 하나 없나. 한국군이 나오는 영화엔 대부분 주먹밥인데, 쟤들은 저 뻑뻑한 빵을 우유에 적셔 먹는구나. 저 와중에도 후식으로 커피가루를 물에 휘휘 저어 마시네. 영화 후반부에는 그전까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족한 식사가 제공된다. 그건 중대원들이 위험한 작전에 동원되어 특별 제공된 특식이다. 스탠호프와 롤리는 그게 오스본의 목숨 값이라는 생각에 손도 대지 못한다. 오로지 트로터만이 주머니에 빵을 챙기며 이 식사를 여유롭게 즐긴다.

영화 저니스 엔드, 배우 '에이사 버터필드' 개인적으론 휴고의 어린아이가 장성해서 반가웠더랬다.

영화는 종종 전장의 안개 낀 대지를 비춘다. 지친 군인들을 뒤로하고 무언가를 찾아 나선 카메라는 텅 빈 초원을 응시한다. 인간에게 전혀 호의를 내보이지 않는 자연, 날카롭게 날이 서있는 돌과 바람. 흙에 자기 육체를 직접 부딪치고 사는 그런 생은 잊힌 지 오래다. 역사는 곧이어 그들이 모두 죽고, 연이어 수백만의 양국 군이 죽어나갈 거라고 말한다. 군인들은 텅 빈 눈빛으로 죽음을 기다린다. 그 흔한 살육 장면 하나 없이도 영화는 전란의 여파를 그려낸다. 연출과 작품이 가진 주제를 일치시키는 방법임과 동시에 역사의 비극을 마주하는 제의에 가깝다.


오래전 수용소에 관한 글을 읽다가 질식할 것 같은 시간을 버텨내는 인간의 모습에 밑줄을 쳤다. 인간의 지성이 무엇보다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이다. 기억과 현실의 참혹함을 머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인간이 가진 지적 사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수용소 같은 암흑의 핵심에서는 더더욱 사고의 위력이 배가될 수밖에 없다. 현실의 고난을 복구할 수 있는 사고력을 지닌 자는 무언가를 떠올리며 시간에 저항한다. 하지만 현실을 뒤틀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쉽게 목숨을 버린다. 가장 약해 보였던 소위 롤리가 임무를 마친 후 책상 앞을 앉아 글을 쓰는 이유는 뭘까. 그는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유폐된 시간을 적는다.


지루한 참호전이 끝난 뒤의 독일이 총공격을 한 첫날이 영화의 나흘째 목요일이다. 영화는 이 지독한 전쟁이 수백만의 사상자를 냈음을 알리며 맥없는 최후를 맞는다. 이때 낯선 장면 하나가 틈입한다. 동생 롤리의 편지를 받는 누나의 집. 따듯한 채광이 눈부신 응접실에서 동생의 안부를 살피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다. 어쩐지 저 앞에서 문을 열고 롤리와 스탠호프가 들어설 것만 같다. 참호 속에서 책 한 권 없이 불안과 상실을 견디던 이들은 아마도 저 밝은 채광을 그렸을 것이다. 여인의 미소와 따듯한 홍차를 마시며 영국식 정원을 걷는 스탠호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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